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욥기 12:10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편 40:16
그냥 자꾸 속상하였다.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사가 귀찮고 매사가 의욕이 나지 않았다. 이내 아이는 오지 못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우울하였다. 그러려니 하고 말면 될 일이 아니었다. 자꾸만 속상하고 답답하였다. 어찌할 방도는 없었다. 본인도 자신이 어째서 그러한지 알 길이 없는 문제라, 나는 다만 중심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이 아침, 말씀이 나를 붙드시는 것 같다.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 12:10).” 온통 신종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나는 ‘아이의 공황’으로 마음이 어려웠고 두려움은 가중되어서 모두들 돌아가고 병적으로 교회 청소를 하였다. 아무리 해도 옮기고 정돈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돌아오자 허리서부터 온 몸이 다 아팠다.
우리는 끄는 죄의 줄이 한 겹이 아니다. 여러 겹의 죄의 줄이 수레를 이끌 정도이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말씀을 되뇌며 우리를 둘러싼 그 줄의 단단함 앞에 속수무책이라. 나는 당신이 더 불쌍해! 하는 아내의 핀잔인지 걱정인지 퉁명스러운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라는 고백처럼,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40:16).” 오늘 시편의 기도를 읊조린다. 그러니 아이들 앞에 이를 어찌하면 바르게 가르치고 온전하게 전할 수 있을까?
지금 모두가 다 난리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8:22).” 그러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나는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 다시금 기도를 부탁할 따름이다. 모두가 잘 됐으면 좋겠는데 괜히 나 때문에 다들 힘든 것만 같아서, 이 말도 안 되는 의기소침함이 교만한 것인 줄 알면서도 왜 나는 곁에 있으면 애들이 더 그러는가싶기도 하여.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부디 하나님을 멀리하는 일이 없기를. 그렇게 또 하나님을 저버리고 나면 너무 먼 길을 돌아야 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 누가 내 심정을 알까?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속상할 따름이었다. 해줄 게 없고 해줄 수도 없어서 아이의 맥락 없는 소리와 아이의 뚱한 태도와 아이의 안타까운 상황을 하나하나 어찌 감당할 길이 없어서.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 5:2-3).” 다들 그렇다고 해도 문제고, 나만 그렇다고 해도 문제고 그러니 오늘 내게 맡기신 바, 저 아이들로 인하여 나는 속상하였고 답답하였으나 딱히 뭘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4).” 우리의 죽을 맛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한다. 곧 오늘 이 모든 상황과 사실들 앞에서 나로 하여금 주 없이 살 수 없게 하시는 것처럼 아이들에게도 또한 저들로 인해 그 가정에서도 주를 바라며 주께 나아오기를. 이 로마와 같은 땅에 살면서,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결코 괜히 왔다 괜히 돌아가는 발길이 없기를. 그래도 저 아이가 주께 바라고, 저 아이가 헐레벌떡 시간에 맞춰 교회로 뛰어오고, 저 아이는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의식과 말과 행동으로 힘에 겨워하는 삶을 살고 있으나…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우리도 다를 바 없는 세상에 살면서 저들과 같이 추구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또 이처럼 주 앞에 나아와 감사와 찬송으로 의롭다 하심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여전히 안이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부모와 형제와 그 주변의 이들까지 주께서 돌보시고 다스리시려고, 나는 저 아이들의 책임이 그래서 더 무겁게 여겨진다. 그 부르심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저들 하나하나 그 삶의 고달픔에 대하여는 공감할 뿐 어찌 덜어줄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점점 더할 텐데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 3:1-2).” 그러한 부모의 모습과 자신의 상태를 애써 외면하고 부정하며 모르는 척 하고 산다 해도,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3-4).” 그러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5).” 그러는 게 자칫 ‘다들 그러고 사는 모습’으로 여겨질까 하여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화요일에는 못 온다고 하는 아이에게 그럼 월요일에 오라하여 저와 만나기를 없이하려 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두시는 자리라. 나의 역할이라.
아무리 그래봐야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은 아이 하나하나를 놓고 자주 회의하고 실의에 빠지고 낙심하기 일쑤지만, 그러니 또 어쩌겠나?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수밖에. 나는 달리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누구는 함께 수련회도 가고 어디 집회에도 같이 참석하고 이런저런 방도를 찾아 모색하고 함께 이끌 수 있는 능력이 될 테지만, 나야말로 나 하나 건사하는 일조차 힘에 겨운 사람이라.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시 40:17).” 주는 나의 도움이시다. 주만이 나를 건지실 것이다. 주여 이 일을 주체하지 마소서. 수일 내에 행하소서. 나의 지경을 넓히소서. 나는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주님 도와주세요, 함께 하시고 긍휼을 더해주세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 아이를 생각하며 아뢰다, 나를 위하여, 그 가족들을 생각하다, 아이를 위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이 또한 주가 주셔야 할 마음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주께 아뢰고 고하고 의지한다.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게 하심도 주의 권능이라. 주께서 그리하셔야 그리 이룰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 6:12).” 나를 수시로 옥죄고 틀어쥐려 하나 얽매이지 않으리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나는 아이에게 다짐하듯 말씀 의지하자. 하나님만 의뢰하자. 어떠하든 우리로 주만 구주로 삼게 하려 하심이니,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욥 12:9).” 오늘 욥의 고백을 나는 그리 읽고 이해하고 묵상한다. ‘이것들’ 곧 오늘의 이 모든 상황 ‘어느 것이’ 주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겠나? 주의 손이 행하신 줄 알면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을 의뢰할 수 있는 것이 또한 귀하디귀한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 주만 바라고 주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