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마소서
욥기 17:4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편 45:6
깨닫지 못하는 열심도 있다. 종종 누구의 신앙이 위태로운 것은 그래서이다. 욥의 친구들처럼 저마다 열심으로 훌륭한 것은 아니다. 가령 하나님을 죽어라 하고 열심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심이 때로는 역겹다. 사이비나 광신자들의 무모함은 전투적이다. 스스로 열심일 때 그 수고는 자신을 망치고 타인을 해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러니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게도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 내가 누구를 대할 때 저 아이 또는 그 부모의 몰염치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사랑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처럼 사랑 된다.
성경에서 ‘잘못된 열심’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경우는 많다. 예수님은 언제든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들의 열심을 힐문하셨다. 저들의 열심은 외식하는 거였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 자기 열심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무리는 영락없다. 나는 사실 오늘 날 현실정치에서 왜 기독교가 대두되고 앞장을 서는지 알 수 없다. 선동하고 혐오스러운 발언을 일삼는 자들의 역겨움에 대하여는 할 말이 없다. 저들의 전투적인 열심은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힌다. 그와 같은 열심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독이 되는 열심에 대하여 강변하였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축약된다. 하나는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 즉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 다른 하나는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다. 같은 맥락의 말이지만 하나님의 의를 모를 때 자기 의를 세우는 법이다. 지식을 좇지 않는 의란 무엇일까? 그 답은 다음 구절에 나온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 즉 이미 ‘율법의 마침’이 되셨는데 스스로들 죽어라 하고 율법에 매여 열심을 다해 사는 것이다.
열심을 다하면 좋은 것 같으나 그 열심은 극단적이거나 왜곡되었거나 자기 의를 돋우며 만족스러워한다. 성경의 기본 지식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여전히 구원을 얻기 위해 열심을 다해 수고하고 애써야 한다고 여기는 일에 대한 경고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다. 그리스도의 의는 율법을 마치셨다.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이를 믿음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의에 참여한다. 그것이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3:10).” 즉 의롭게 되는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누구보다 더 열심으로 무얼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 게 아니다. 이 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다. 예수께로부터 오는 의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10:5).” 이미 말씀이 이를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6-7).”
이 말씀은 신명기의 것을 인용한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신 30:12-13).” 즉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열심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애썼다. 애쓰면 애쓸수록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있었으니 아무도 스스로 하늘에 올라 주의 명령에 이를 수 없다는 것과 누구도 땅에서 이를 실천하여 합일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율법은 우리로 우리의 연약함과 무한한 죄인 됨을 알게 할 뿐이다. 이를 인용하며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구원을 이룰 수 있나니, 하나님이 하늘에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의 음부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이루셨다. 이를 우리는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
그래서 저는 우리에게 믿음의 말씀뿐임을 강조한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8).” 말씀이 내 마음에 있고 입에 있다. 이처럼 가까이 있다. 곧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9).” 마음으로만 믿어서도 될 일이 아니고, 입으로만 떠벌여서도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 오전에 오는 아이가 자주 언급하다 ‘언행일치’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를 성경의 언어로 풀어보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이를 설명해주다 어려워해서 우리가 아멘, 하고 받는 것이 곧 그것이라고 일렀다. 아멘으로 받고 감사로 사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이의 성실함과 꾸준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오후에 오는 아이에게도 그리 일렀다. 다들 누구는 저를 장애가 있다고 하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인 저의 하루를 나는 사랑한다. 40여 분 걸리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버스 타고,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오는 매일 아침마다의 저의 수고를 나는 귀히 여긴다. 심지어 그의 엄마도 그저 그러려니, 갈 데가 없고 할 일이 없으니 그러는 것으로 치부하고 마는 저의 성실함에 대하여!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롬 10:11).” 나는 이 말씀을 그리 읽는다. 저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죽어라 하고 열심을 다하는 누구의 신앙보다 저의 단조로운 일상을 나는 귀히 여긴다. 그 까닭은 누구의 열심은 그때마다 다르다. 또는 해야 하는 당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교회 숙제다. 학부모 의무다. 가령 한동안 잠언을 필사 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아이들 학교가 미션스쿨인데 그게 부모들과 같이 하는 겨울방학 숙제였단다. 어쩐지. 또는 저가 하는 성경공부는 어렵기 그지없다. 엊그제 친구하고도 통화하면서 그런 우려를 했지만 행여 성경공부가 ‘장로의 유전’이 되지나 않을까 하고 당부하였다.
율법에 매인 사람들처럼 단어 하나 그 의미 하나에 의미를 덧대고 설명과 온갖 해설과 가설을 더해서 정작 그 본뜻은 희미하고 엉뚱하게 갖가지 인용과 예화와 여러 사례들로 난무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예로, 결국 이스라엘이 7, 8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정작 저들의 경각심은 율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저들은 코라에 의해 안식일에는 전기코드도 올리지 않는다. 극단적인 열심의 장본인이 사실은 바울이었다. 저의 열심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음에 내어주는 일을 하였다. 그 후로 고백하기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우리는 누구도 자기 열심으로 하늘에 오를 수 없고 땅에서 건짐을 받을 수 없다. 다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예수는 나의 구주시다. 저가 사람으로 오시고 나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심을 믿는다. 이 믿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모든 사람 앞에서, 어떤 일을 두고도, 그리하여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하여, 자신의 의를 앞세우는 자들에 대하여 오늘 욥은 강력히 주장한다.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마소서(욥 17:4).” 우리는 누구의 정죄도 당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어째서 그런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 다 이루신 구원이다. 믿음으로 나는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 오늘 시인의 찬양을 음미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 4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