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전봉석 2020. 2. 10. 06:54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기 19:25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시편 47:6

 

 

갑자기 외롭다는 생각이 훅, 하고 끼쳤다.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예배에 앞서 찬송을 하는데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니, 그냥 도망치고 싶은 마음 같기도 하였다. 아이는 집 앞에 있는 교회로 갔다. 그것을 알려주는 카톡이 들어오자 눈물이 터졌다. 그냥 서러움인지 외로움인지 안타까움인지 답답함인지, 갑자기 고독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늘 말씀에서 욥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19:17).”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18).” 그러니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19).” 새삼 텅 빈 자리가 너무도 많고 휑하니 나 혼자 떠도는 섬 같았다. 훌쩍거리며 콧물을 닦아내자 서러움인지 서글픔인지 와락, 하고 정체불명의 눈물이 쏟아졌던 것이다.

 

,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25).” 말씀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한 아이는 다 끝나고서야 헐레벌떡 뛰어왔다.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애 말은 뭐라 해도 늘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듣기 싫고 꼴 보기가 싫었다. 식사를 하고 모두 돌아간 후 홀가분하여야 할 마음이 더욱 짓누르는 돌덩이 같았다. 집 앞의 교회는 어땠는지, 아이가 사진을 찍어 보내온 주보를 살피고 아이의 상태를 묻고 그러다 불쑥 다음에는 엄마와 동생들, 가족들과 같이 갈 수 있도록 하자고 말했다. 하나님이 어찌 하시려는지.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 속하였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19-20).”

 

주만 바라지 않고는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이제 좀 다 키웠다싶으면 도로 시작인 싸움이다. 이제 좀 곁을 주고 의지가 되려나하면 영락없이 무너뜨리는 형국이었으니. 내가 보기에 이 일은 늘 공든 탑이 무너지는 꼴이다. 잘 되든 못 되든 하나님은 나만 대면하자고 하시는 것 같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항상 나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성경은 한 목소리만 낸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47:6).” 누굴 보고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소득이나 가시적인 결과를 내는 일도 아니며, 무슨 평가도 아니고, 그저 다만 홀로 가는 길이라. 어릴 때 학교 우리에 늘 혼자 서 있던 단봉낙타 같다. 곧잘 나는 그 앞에 서서 본래 저 아이가 걸었을 사막을 생각하곤 하였다. 아득한 모래언덕과 작렬하는 햇살을 생각하다 오금이 저리기도 하였다. 나의 어린기억에 늘 혼자 서 있던 단봉낙타는 눈망울만 슴벅거리면서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저는 그 길을 그리워하고 있던 것일까? 행여 나의 열심이 잘못된 것은 아닐지.

 

외로울 것도 그리울 것도 없는 사람처럼 굴다가도 불쑥, 마음에 밀려드는 모래바람을 감당할 길이 없다. 우리 안에 혼자 서 있던 단봉낙타를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린 게 외롭다거나 고독하다는 감정을 알기나 했을까? 우리 안에 갇힌 단봉낙타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서 있던, 나의 어린것이 떠올라서 한참을 빈 교회에 남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편의 요지는 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동시에 그리하여 주를 찬송한다는 것이었으니, 어울릴 수 없는 이 두 마음을 어찌 감당하면 좋을까? 욥의 서러움이 느껴지는 것 같다.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19:21).” 이내 버릴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신호는 외로움일 뿐이다. 그런데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22).” 지금의 이 심정이,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23-24).” 어쩌면 저의 기록은 오늘의 내게 읽혀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묻는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30:15-16).”

 

말씀 곁에 가만히 서서 내가 내 의지로는 말씀을 붙들 수도 말씀으로 위로 받고 견고하게 설 수도 없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그것마저도 말씀이 하셔야 하는 일이어서 말씀이 아니고는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도 없는 사람이라,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7:40-41).” 이를 획일적으로 그럴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는 왜 저렇게 붙드시고 어떤 이는 왜 이렇게 붙드시는지. 나의 풍랑 이는 마음을 다스릴 이는 또한 예수의 말씀뿐임을,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4:39).” 그러니 참 이러는 게 그저 이상할 따름이어서, 한 영혼으로 울고 웃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내 안의 외로움이라니! 단봉낙타는 눈을 마주치고 가만히 서서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지 연신 우물거리고는 하였다.

 

말씀밖에는 답이 없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11:43-44).” 이는 날마다 다시 사는 일이고, 거듭나야 하는 일이지 내가 어찌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애써 수고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일도 아닐 거였다. 어릴 적에 한참씩 눈을 마주치고 있던 단봉낙타의 커다란 눈 속에는 저가 걸어왔을 까마득한 모래사막이 펼쳐져 있는 것도 같았다. 늘어져 티브이를 보다, 무슨 쇼프로를 보다가 울컥, 솟구치는 눈물의 정체를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살 수 있는 것을,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주를 향하는 길은 결코 낭만이 아니다. 의기투합하여 굳건한 의지로 견디는 걸음도 아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보았던 단봉낙타를 기억한다. 등하교 때면 학교 초입에 있던 여러 동물우리들 가운데서 유난히 혼자 서 있던 단봉낙타 앞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곤 하였는데, 어쩌면 저는 내게 일찍이 말해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염없이 걸어온 길이 돌아보면 그저 까마득하였을 뿐, 문득 그 그리움은 여전히 모래사막을 건너는 중이라는 것을. 어쩌면 바울 사도도 그와 같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하는 게 아닐까?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 그리하여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 내 의지나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한 영혼을 마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 늦어서 헐레벌떡 뛰어온 아이를 나는 사랑해야 할까, 미워해야 할까?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나는 나를 어쩌면 좋을까?  알아듣기나 하는 것인지, 저 '아픈 아이'의 엉뚱한 소리에 나는 일일이 답할 수가 없어서,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내가 단봉낙타의 눈빛으로 늘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19:25).” 저가 아니시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47:5).” 그러니 나의 할 일은,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6).” 나의 찬송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커다란 눈망울을 슴벅거리며 연신 할 말이 있는 단봉낙타처럼 우물거리면서,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7).” 나의 찬송이 결국은 내 의지로의 것이 아님을, 그것도 주께서 다스리심이라.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