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욥기 21:13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시편 49:18-19
이 땅을 살며 잘 되고 장수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오늘 욥의 증언도 그것이다.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욥 21:13).” 모처럼 친구 둘과 통화를 하거나 연락이 되었다. 하나는 딸아이가 독립출판사를 운영하게 되었고 나름 주목 받는 신예 작가로 발돋움하는 것에 대해 자랑하였다. 그리고 딸아이가 기획하고 작업하여 출판한 책 네 권을 보내왔다. 대충 훑어봐도 당돌하고 야무진 아이였다. 그 일로 다른 친구와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이래저래 요즘 출판 업계에서 각광받는 저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니 주어진 네 권의 책을 읽어보기는 해야겠으나… 나는 요즘 무슨 영화가 어떤 큰 상을 네 개나 타서 열광하는 일에 대해서도 시큰둥하다. 영화도 봤는데 그게 그렇게까지……?
나는 되레 오늘 아침의 말씀에서 식겁한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시 49:18-19).” 그러니 한 친구는 기껏 담배도 끊고 교회에서 재정집사도 맡아 믿음 생활을 잘 하는가싶었는데 저는 그 일에 시큰둥해져 도로 남이 되었다. 그런 거 보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두려울 정도로 가까이서 들린다.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 그러니 내가 바보가 된 것인지, 다들 열광하고 선호하는 일에 대하여, 서로가 칭찬하고 스스로 좋아하며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는 시큰둥하여, 그게 그 정도야? 엉뚱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그런데 말씀은 가까이서 들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5).” 하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를 도우신다.
그냥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신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38-41).” 이와 같은 말씀이 크게 들리고 모두가 열광하며 연실 환호하고 기뻐하는 일에는 시큰둥한 것에 대하여 소외감을 느끼다가도 하나님은 우리의 인내를 도우신다. 그러니까 결코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신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또한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놓여나게 하신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그러할 때 성경의 가르침은 한결같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랄 뿐이다. 돈이나 명예보다 진리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 119:36).” 그러다 넌 좀 어떠냐? 하고 물었을 때, 다들 그놈의 돈 때문에 일생을 끙끙거리고 있는 것이니 있으면 있어서 끙, 없으면 없어서 끙, 그저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죽겠다는 소리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우리 눈을 여셔서 말씀을 바로 보게 구하는 일,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86:11).” 그리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게 하시기를. 이는 곧 이 땅의 생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릴 수 있게 하시기를, 이는 단지 도도한 척 세상을 이긴 자의 자세가 아니라 더 나은 즐거움을 아는 자의 너그러움이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90:14).” 사는 일이 어찌 녹록하겠나? 욥의 고백처럼, “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6).” 내가 결코 잘났다고 하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 오롯이 주의 도우심만이 살 길이다.
나의 나 된 것은 삼위 하나님의 작품이다. 성부 하나님을 따라 새 새람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그러니까 내가 내 의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한 소망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4).” 이는 사랑 안에서 자라는 일로써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16).” 이내 성자 하나님 안에서의 가르침이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21-23).” 오늘 날 세상이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축하하는 일에 대해 무덤덤하고, 1인 출판의 시대에 제도권을 비껴나서도 홀로 멋지게 성장하는 딸애의 작업을 뿌듯해하는 친구의 자랑이 그다지 부럽지가 않은 것은,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욥 21:13).” 저들은 오히려 내가 이러고 있는 일에 대해서 시큰둥하다. 한 영혼을 두고 씨름하는 일에 대해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면서도 생각이 많은 날들이다. 겉은 그런데 ‘그래서, 넌 좀 어떠냐?’ 하고 물었을 때의 그 속내는 말이 아닌 거라. 문드러져 속이 터질 정도이면서 그럼에도 괜찮다, 다 그러고 산다 하면서 홀로 위로하는 지경이었으니, 특히 한 친구와의 통화에서 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다. 다른 친구야 원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라 서로의 길을 알 리 없고 말하여도 들으려하지 않는 것이니, 그런데 이 친구는 줄줄이 형님들이 목사고 그의 선친은 월남하여 평생을 한 교회를 섬기며 장로로 권사로 헌신하다 죽었는데, 유년을 교회에서 보낸 사람으로 지금은 저에게 교회가 단지 한 문화의 장르와 같은 게 되었으니… 에구, 하고 혀를 끌끌 차면서 나는 통화를 끊었다. 말이 길어진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고! 살면서 우리가 생각이 많은 때에, 결국은 주의 도우심뿐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시 94:17).”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8-19).” 참 아이러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미끄러진 때에 주의 인자하심을 경험하고,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을 즐거워한다.
저들 친구에게는 어찌 설명할 길 없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으니… 다들 살면서 안 미끄러지고 안 넘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야 인지상정이고 그것을 복의 기준으로 누구는 승승장구함을 자랑하고 누구는 낙심하여 좌절하나, 상대적으로 오늘 욥의 진술처럼 또는 시인의 탄원처럼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3).” 하나님 없이도 잘만 살고, 하는 일마다 주목 받고 각광 받는 저들의 개가를 들으면서 우리는 마음에 생각이 많은 것이다. 실제 안 믿는 사람보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더 생각이 많다. 저들은 그저 껄껄, 웃어넘기는 일을 우리는 씨름하며 주께 아뢰기도 하면서 미련을 떨기도 한다. 오죽하니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갈대 같이 연약한데,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을까? 그런데 놀라운 반전은 근심이 많고 미끄러졌을 때 저들이 추구하는 방식과 우리의 방식이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그런 와중에 주의 인자하심을 누리고 주의 위안으로 영혼의 즐거움을 삼는다. 그러니 나의 친구들에게조차 나의 오늘 모습이 낯설고 이해가 안 될 뿐이다. 본래 그런 친구가 아니었는데, 하고 혀를 끌끌 차면서 도리어 나를 안타까워한다.
그러게. 난 잘 모르겠다. 그 영화가 그렇게까지 열광하며 여러 상을 거머쥘 만큼 작품성이 있었던가? 미안하지만 오후께 친구 딸애의 책을 살펴보면서 글쎄, 이게 대체 주목 받는 신예 작가로서의 작품성이 인정받을 만한 것인가? 문장도 좋고 내용 전개도 깔끔하지만 그렇게까지야….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욥 21:8).” 안 믿는 친구의 잘 되는 자랑거리 앞에서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9-10).” 오히려 하는 일마다 척척 잘 풀리니…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11).” 그래서 부러운가? 뭐라 해주면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14).” 참 때로는 이해불가의 전개다.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23-25).” 이러니 그러한 현상만 놓고 반론하면 입이 열 개라도 저들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다. 이를 두고 오늘 시인은 일갈한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6-8).” 누구 그 영혼의 구원을 값으로 지불할 수 있겠나?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12).” 그 날이 한날 같다면 굳이 그렇듯 애를 쓰고 기를 쓰고 죽어라 하고 살 일이 무언가?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13).” 성경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16).” 왜냐하면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17).”
오늘의 영광이 다 무슨 소용이 있나?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18-19).” 다시 한 번 성경은 강조하신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