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기 22:21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50:15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무릎을 꿇는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엄연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누가 아프고 갑자기 무슨 일이 터지는 데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엄히 강조한다.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이에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 4:39).” 이를 바로 아는 것이 지혜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성경의 관점은 엄중하여서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대로 결정하신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그러니 우리가 어찌 임의로 하십니까? 할 수 있겠나?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사 10:15).” 그럴 수 없다. 욥은 말하길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9:12).” 하고 저의 늙은 친구 엘리바스도 오늘 말한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22:21).” 그리하여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22).” 저가 어떠하든 그 말은 맞다.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두라는 것. 고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앞서 지혜자는 그 절대 주권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더하심으로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게 하셨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그도 그런 게 형통한 날만 계속 되면 저는 기고만장하여 이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소위 졸부라는 이들이 저도 모르게 괴물이 되는 것과 같다. 대체로 무력증은 안이함에서 온다. 그러한 우리의 길을 지도하심이 곤고함이다. 나의 걸음이 내 것이 아니라는 데서 주를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곧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바른 길을 간다. 오늘은 은혜다. 내일은 내 것이 아니다. 이 한 날에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게 복이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나도 한 다리 건너 들은 이야기라 누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저는 서울대 약학박사이고 약사 일로 아파트 두 채, 건물 두 채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를 더 이쪽 신도시 쪽에 채우려다가 뭔가가 삐끗하여 잠시 귀국을 했다고 한다. 이혼을 했고 아이 둘은 어디 국제학교에를 보냈는데 그 수업료가 어마어마하다. 듣다보니 하나도 부럽지가 않고 도리어 불쌍할 따름이라.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그러니 저는 가지고도 또 가져야 하는 괴물이 되었는데 애써 공부한 것은 허사가 되었다. 저는 알지 못한다. 그 모든 일의 주권자가 누구인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9).” 실은 저의 부모가 누구 보증을 서서 덩달아 신용불량자가 되었다고 하니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가관이라. 누구한테 저의 이야기를 듣다말고 손을 내저었다. 듣기 싫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통과 곤고를 병행하게 하셨다. 곧 내일 일을 알지 못하게 하시는 축복을 주셨다. 미래를 안다고 복이 아니라. 잘 될 일이면 그 일을 기대하느라 안달이 날 테고, 안 좋은 일이면 미리 끌어다 염려하느라 오늘을 살 수가 없을 테니까. 오늘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삶을 주셨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다만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이는 지혜다.
강한 의지며 더할 수 없는 의뢰다. 범사에 주를 인정한다는 것. 그 날이 형통하면 형통함으로 감사를, 그 날이 곤고하면 곤고하여서 주님께 기도하는 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의 앞날을 우리에게 일임하지 않으셨다. 앞서 내가 알고 알아서 수행하여야 하는 게 아니다. 한 날의 수고로 족한 것이다. 그러니 어쩐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여라. 지혜자는 말하고 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전 7:14).” 감사하고 기도하라는 소리다.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셨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이는 은혜다. 앞날을 앞서 알면 좋을 것 같지만 그것은 행복보다 불행한 일이다. 좋으면 좋아서 불행하고, 안 좋으면 안 좋아서 불행하다. 그러니 생각하라는 것인데 믿음을 가지고 살라는 소리다. 이에 대해 옥한흠 목사가 정리한 다섯 가지 긍정의 생각을 읽었다. 첫째,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둘째, 우연한 일이 아니다. 셋째, 나쁜 일은 아니다. 넷째, 늘 이렇지는 않다. 다섯째, 혼자 당하는 일이 아니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우연한 게 아니다. 모두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니 나쁜 일이 아니다. 또한 지나간다. 나 혼자 당하게 두시지 않는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고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그런 하나님은 예수님을 결코 혼자 두지 않으신 것과 같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이는 오늘의 내게 고백하도록 하는 말씀이 된다.
그렇게 누구도 박사가 되고 나름 기대를 했던 장래 일인데 대우나 사는 데 따른 모양은 그것 때문에 더 자괴감이 들고는 하였으니, 저도 그러는 저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어 하나님께 향해 뽀로통한 상태다. 학위를 따기 위해 몇 년을 고생하였는데, 하나님은 고작 나를 이런 일(?)에나 쓰시려고 그러시는가, 하고 푸념이 이어졌다. 오죽하니 속상하고 자존심도 상해서 몇 년 만에 맥주도 한 잔 했다나? 뭐라 해줄 말이 없어서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또 누구는 아파트 한 채를 사두고 여태 자기 집에 살 수도 없어 전세를 주고 전세로 살던 터라, 뒤늦게 자기 명의의 집으로 들어가 살려니까, 내 것이 주는 번거로움과 거추장스러운 게 어쩜 그리도 많은지… 늘어지는 한탄을 듣다말았다. 좋을 줄 알았는데, 그처럼 기를 쓰고 살면 좀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여겼는데, 거기에 보란 듯이 포장을 하듯 의를 행하고 선을 구하며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듯 행세도 하면서…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 하고 묻는데, 나는 저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알지 못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가진 게 네 것이라 여기는 한 네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엄연히 피조물이다. 주신 이의 뜻에 따라 쓰임을 받는 것이 가장 귀한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자신에게 관심이 있으실 뿐이다. 우리 삶은 어차피 하나님도 다 아신다. 도끼가 어디에 쓰이겠으며 장도리가 어떤 일에 필요하겠나?
그러니 참 우리의 오해는 지독하여서 마치 자기 인생을 자기가 설계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야 하는 줄 안다. 내 돈이 내 돈인 줄 알고, 내 건강이 내 건강인 줄 알고, 내 지식이 내 지식인 줄 알 땐 천하의 서울대 박사학위를 가지고 남의 나라 전통 액세서리나 만들면서 소일거리로 늙어가는 것이다. 물론 팔자 좋게 고국에서 들어오는 월세를 받아가며 남부럽지 않게 형통한 삶을 사는 것 같겠으나 저는 이미 괴물이 되어 그러고 사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길 줄도 모른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 누가 와서 직접 자신의 삶을 하소연할 때면 나는 때로 뭐라 말해줘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저들도 안다. 안다고 여기는 한 무슨 말로 하든 그 귀에 들리겠나? 부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나는 엘리바스의 말에 밑줄을 긋는다.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22).” 다른 더 좋은 수는 없다. 그러므로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27).” 그러므로 부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성경의 가르침은 엄연하였다.
감히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21).” 하나님의 주권 앞에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은혜였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22).” 그러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