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전봉석 2020. 2. 14. 07:01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 23: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주 앞의 삶이란,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딛전 2:2).”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4).” 그러니 내가 누굴 사랑한다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전부를 사랑함이라, 저의 지나온 날들과 주변의 여러 말할 수 없는 일들까지도 그의 일평생을 사랑하는 일이니 너무 어렵다. 사람을 마주하고 대한다는 일은 참으로 힘에 겨운 일이다. 누구는 내게 너무 감정이입을 해서 그렇다며 다른 것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나도 누구에게 말해주는 일이라면 그리 말하였을 것이나 내 일이 아닌 이상 누가 알겠나? 오늘 욥의 고백이 일생에 빈번하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그러니 어쩔 것인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10).” 이와 같은 결연한 의지와 신뢰가 아무나 지닐 수 있는 것이겠나? 그래서 다윗의 고백이 가슴을 후비는 것 같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 누가 동남아 쪽 어디에서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는 일에 대해 권하였는가 보다. 토요일에 성경공부 오는 친구는 기껏 여권도 만들고 그 중간 브로커인 누구를 만나러 가면서 전화를 하였다. 안 그랬으면 좋겠다, 하고 말해주었으나 것도 내가 강요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그러니 그 나이에, 그 속이, 그 애타하는 마음이 안쓰러울 따름인데. 보면 안 믿는 친구들로 둘러싸여 산다는 일은 그리 자꾸 요령을 피우게 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리 마음을 두지 못하게 한다. 보다 현실적이고 당장에 어떤 결과를 바라는 데는 하나님보다 안 믿는 친구들이 더 나은 듯도 하다.

 

그러니 그러고 말면 될 일인데 그것이 내내 얹힌 것처럼 마음을 어렵게 하고 속상해서화목 두 시에 오는 아이 엄마가 폐암 1기 수술을 하였다. 그 일로 서로 어떤 다툼이 있었던가보다. 아이가 사가지고 온 주전부리를 먹으며 이야기를 하였다. 병원에 가기 전에 아빠한테 엄마가 짜증을 냈고 아빠는 무책임하였으며 언니는 무신경하였던, 그럴 수밖에 없는 저들의 관계에 대해 나는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아이에게 아이의 역할을 운운하고 같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였다. 그래도 아이만 온전하게 모두의 사랑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엄마는 어쨌든 아빠에게 무안하고 큰 딸에게 무안하다. 아빠는 큰 딸에게 무안하고, 큰 딸은 친 아빠가 아니니 아빠에게도 무안하다. 순순히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이에게 누구는 아예 남남인데 입양을 하고 서로의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고 딸이 되더라, 하는 말을 해주었다. 서로가 어중간해서 그렇다. 두 사람은 이혼 상태이고 어쨌든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관계로 있는 중이었으니, 오히려 새중간에서 모두의 공동분모가 되는 엄마나 온전한 사랑을 가진 아이가 되레 무안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무안할 따름이면 그 어중간함을 어찌 감당하고 살겠나?

 

그럼에도 따라주는 아이가 희한하고 고마웠다. 참 신기한 것이다. 나야말로 아이의 태도에 지치다가도 다소곳하니 말을 듣고 네, 하고 대답하는 아이로 인해 마음이 설레었다. 누구 말마따나 나의 감정이입이 나를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찌할꼬? 성경은 일갈한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16:31).” 처음에는 아이가 주일에 예배에 간다는 걸 그렇게 반대하더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되레 그 시간에 깨워주기도 한다니까. 그러므로 내가 중심을 잡을 것은 다른 일을 벌이거나 어떤 것에 다른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밖에 길이 없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아이가 떡볶이와 순대를 다 먹으며 이야기를 마칠 동안 기다렸다가 같이 성경을 읽고 그 뜻을 풀어 주의 도우심과 은총을 구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전에 오는 아이는 사사건건 치대듯 카톡을 하고 감정을 오버하여 엉뚱한 소릴 하곤 하였으니. 하루에 벌어지는 일이 나에게는 이만하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누가 외국 여성에게 쓴 글을 보내오고 수정을 좀 봐달라고 하였다. 이거야 원. 안 보냈으면 좋겠다, 하고 한편으로 치우고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았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이게 어찌 범죄한 다윗만의 고백이겠나?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51:11).” 주의 성령이 나와 함께 아니하시면 나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는 존재인 것을. 그러므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2).” 자원하는 심령이 아니고는 내가 저들의 이런저런 사연에 개입할 여력이 안 된다. 때론 지겹다. 공황이 와서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나는 조심스러워서 통화도 카톡도 신중하기만 한데, 오전에 오는 녀석이 뭐라 연락을 하고 전화도 하는 모양이었으니, 이걸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지 하라고 그냥 냅둬야 하는 것인지. 나는 모든 게 너무 어렵다. 그러니 내가 누구 앞에 당당히 하소연하며 아뢸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한 시도 살 수가 없다.

 

친한 형님들이 그러는데, 우리 사장은 말이야, 어떤 유명한 박사가 말하길하면서 저마다 누구의 어떤 말과 삶과 그의 성공 사례를 들어 하나님보다 가까이 둔다. 그 소리가 더욱 선명하고 확실하게 여겨진다. 그러고 있느니 뭐라도 해! 그리하여 누구는 여권을 만들었고, 누구는 그 정도야하는 허용의 범위를 넓혀 안 믿는 이들과 술자리에서 오가는 무용담이나 조언을 아침의 말씀 묵상보다 오래 기억한다. 뭐라 한들!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시는데 나는 그럼에도 하나님을 바란다는 일은 묘연하고 막연하여 무안하고 무색하다.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8:17).” 그러니 너는 어쩔 것인가? 하고 성경은 되묻는 것 같다. 다들 그러고 살며 그렇다는데 너만 옳은 줄 아냐? 하는 누구의 조언에 나는 마음이 상해서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 안에 울컥, 하고 이는 마음 하나도 주체할 수 없는 위인이라. 그러니 아픈 사람 취급을 당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생각 같으면 아이도 좀 일주일에 두 번만 오게 하고 연락도 가급적이면 답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같은데겨울방학 하면서 실패했지만 지금이라도 매일 두 시에 올래? 와서 여기서 글도 쓰고 책도 읽고 공부도 하면서! 집구석에 있어봐야 늘어져서 하는 것도 없이 하루를 허송하는 게 아니냐? 하고 아이에게 권하고 있었으니.

 

남을 이해하기는커녕 내가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를 모두 하나님께 돌린다. 이게 다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어차피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이시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119:166).” 그래, 나는 달리 할 일이 없다. 할 수 있는 재주도 없다. 다만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38:15).” 돼도 않는 소리 같으나 나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의 권능을 요구한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3:24).” 내가 시작한 일이 아니다. 내가 하겠다고 나선 일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억지로 끌어다가 여기에 두신 이가 하나님이시지 않나? 나를 온전치 못하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내 곁의 사람들의 온전치 못함을 마주하고 같이 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이 책임지실 일이지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39:7).”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나는 모르겠다. 다만 이 아이가, 그의 한 영혼이 내 앞에 있으니 나는 주를 바랄 뿐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26:8).” 달리 더 좋은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누구의 조언도 어떤 위로도 필요 없다. 나도 남의 일이면 저들처럼 말해줄 수 있다. 욥의 세 친구와 같이 맞는 말이야 누군 못하겠나? 옳은 소리야 어디 지천에 널려 있지 않던가? 그래서 글은 안 쓰기로 했어? 하고 누가 화들짝 놀라며 물어서 나는 과감하게 응! 하고 대답하였다. 널린 게 그런 이야기다. 나의 공황 이야기가 무슨 새로운 게 있겠나?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미 넘쳐난다. 새삼 내 이야기를 보태느라 시간을 벌일 자신이 없다. 그러느라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됐다, 내 이야기는.

 

내가 무엇을 바랄까? 나의 소망은 오직 주께 있을 따름이다! 이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는 오늘 욥의 진술이 내 것이다(23:10). 그러므로 나를 정하게 하소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51:7).”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