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전봉석 2020. 2. 22. 07:23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욥기 31:4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편 59:16

 

 

두려움과 불안이 사방을 엄습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공포도 있으나 사람들의 동요가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누구는 어디 쉽게 일자리를 옮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종로에서 확진자가 나오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수요가 줄자 일감이 없어 새로 누구를 채용하기가 다들 여의치 않은 것이다. 누구는 박사 학위까지 따고 나름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였으나 너나없이 학위 가진 자들이 넘쳐나는 터라. 직격탄을 맞은 대구에 사는 누구는 아예 외출금지령이 떨어진 셈이었으니, 당장 나가야 할 돈은 넘치는데, 다들 살 길이 막막하다는 근심과 불안의 볼멘소리뿐이었다. 내가 아는 누구만 둘러봐도 그러했다. 인생 길 참 굽이굽이 고갯길이다.

 

애굽에서 나와 광야길 1년여의 시간이 지나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하였을 때 다들 아우성뿐이다.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1:27).” 기껏 이렇게 저렇게 열심을 다했는데 이게 뭐냐고, 누가 원망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성경공부가 헛수고 같고 늘 권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던 일이 허사가 된 것 같았다. 그럴 때 모세가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29).”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이 말이다. 우리 안에 두려워하고 낙심하는 작은 아이가 있다. 저는 자라기를 거부하고 늘 불만투성이다. 조금만 무슨 일이 터지면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고 원망을 늘어놓는다. 생각하고 있는 게 늘 단편적이라, 이렇게 했으니까 저렇게 해주실 거야! 하는 식이다. 자기 생각대로 안 되니까 떼쓰듯 보채고 칭얼거리고 엄마 때문이야!’ 하는 식으로 울어버린다.

 

불안은 불확실한 것에 대한 반응이고, 두려움은 자신이 확신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모두 정상적인 감정으로 마음의 자각증세이다. 훨씬 더 잘 살게 된 세상에서, 나름의 대비와 방책이 꼼꼼하다고 하나 오히려 이 시대의 불안은 더하고 두려움은 여전히 공포에 가깝다. 그때에 다시금 모세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33).” 이는 괜한 말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소리다. 믿음의 사람으로 살면서 이와 같은 체험이 없다면 저는 죽었거나 가짜다.

 

누구나 다 두려워하고 불안과 공포를 호소한다. 사람으로 살면서 이를 초월하고 살 수는 없다. 그럴 때 우리는 주께 호소한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13:1).” 왜냐하면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2).” 마치 어떨 때는 하나님이 보고만 계신 것 같다.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35:17).” 그저 노하시고 질투하시는 것 같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79:5).” 천하의 다윗도 두려움을 호소했다.

 

모세는 그러한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을 처방한다. 오후에 나는 정신과에서 약을 받아 돌아와서 다음의 말씀으로 위로를 얻었다. 저는 먼저 애굽에서 어떠했는가를 좀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때에도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지키셨는가를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1:30).” 하나님이 나의 목전에서 나를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시지 않았던가? 불신앙의 자리에 있을 때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인하며 살 때에도 저는 나를 기다리시고 참으시고 용서하시고, 그때마다 보호하시지 않았던가? ‘나의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셨던 하나님을 묵상하다보면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다. 지금 죽이신다 해도 마땅하기만 한 죄인이다. 그런 나를 위해 지금도 싸우시고 계심을 말씀은 상기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의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31).” 내가 어떻게 신학을 다시 공부할 수 있었는지, 그러는 동안 늘 간당간당한 형편과 사정을 하나님이 어찌 다 수습하시고 무마시켜 오셨는지, 오히려 늘 죽을 것 같이 곧 끝장날 줄 알았는데 그때마다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나는 이 말씀에 전적으로 아멘이다. 금전적인 문제는 물론 건강과 사람과 모든 일처리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홀로 두지 않으셨다. 지치고 힘들 때면 안아주시고 위험하고 위태로울 때면 어김없이 나를 안고 걸어오셨다. 그러한 광야길 같은 나의 여정이 앞으로 사는 날 동안 여전하다 해도 기꺼이 나의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안아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다.’

 

세 번째로는 그 애굽과 광야의 일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도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32).” 그러나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33).” 불안과 두려움을 없앨 수는 없다. 우리 안에 내재된 마음의 상태로서 이는 자각의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다만 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나의 하나님이 어떠하셨는가!’를 묵상하는 일이다. 나는 누구와 통화를 하고 며칠째 늘어져서 살 의욕이 없다는 저에게 말해주어야 했다. 우리의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았던가? 다들 뭐라 한들 하나님은 우리가 갈 길을 지시하신다.’

 

돌아보면 나의 지난 생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옷이 해어진 적 없고 발이 부르튼 적 없다. 다들 죽겠다고 아우성일 때 그때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채우셨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2:23).”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시다. 이곳까지 인도하신 이가 남은 길도 앞서 가실 것이다. 그런데 두려움과 불안은 그때마다 익숙하지 않아서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5:24).”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25).” 불안과 두려움이 없을 수 없겠으나 그 안에서도 자유로울 수는 있다. 모세는 그 비결을 경험에서부터 알았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8:4).”

 

돌아보면 나의 날이 그러했다. 심술부리며 집 나간 탕자처럼 굴 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은 한결같이 나를 위하시고 안으시고 돌보시며 앞서 나아가셨다. 참고 기다리시며 다시 또 용서하시고 인내하신 나의 하나님 아버지는 그때마다 나의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고 의복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다. 나보다 열 배는 더 많이 가졌으면서도 늘 어떤가 물으면 죽겠다, 죽겠다 하는 누구들이 널렸는데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번도 소모된 적이 없었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그저 내가 좀 노력해서 그런 것일까?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다윗은 노래한다. 즉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저는 무엇을 바라고 구하여야 하는지를 안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2:1).” 즉 나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인생 중에서 없어지지 않게 하소서, 하는 기도다.

 

오늘 본문에서 욥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31:4).” 주가 다 내 길을 살피신다. 내 걸음을 다 세고 계시다. 우리의 공포나 슬픔, 불안이나 두려움은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안개를 없애려 애쓸 게 아니라 태양을 기다리면 된다. 해가 뜨면 저절로 물러갈 것을 쓸어내고 덮어두며 어떻게든 이겨내려 안개를 붙들고 씨름할 일이 아닌 것이다. 공포나 불안이 없으면 잘 살까? 두려움과 근심이 없으면 과연 나는 홀로 설 수 있을까?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 오십대 중반을 걸어가면서 내가 둘러본 세상은 여전하였다. 그러할 때 나의 빛, 나의 구원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는 일이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56:4).” 결국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님이시라.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59: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