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욥기 32:2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시편 60:1
가만 보면 말의 문제가 아닐까? 말이 너무 많다. 헛된 세상이라, 저마다 말로다 푸는 것 같다. 욥이 고난을 당하자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말을 한다. 그때마다 욥이 반박을 하고 변론을 한다. 그러면서 얻는 교훈도 크고 그러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을 마주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또한 헛되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누구보다 인생의 모든 것을 누렸던 사람이 헛되다 하니, 모든 피조물도 탄식하는 것이 그도 그럴 것 같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좀 쉰다는 말로 누가 오지 않은 토요일은 헐렁하였다. 이어지는 뉴스속보로 어수선한 날이 계속 되었다. 왜 솔로몬은 인생예찬을 썼어야 옳을 것 같은데 헛되다고 하면서, 고작 222개의 히브리어로 쓰인 짧은 전도서에서 무려 38번이나 헛되다는 단어를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일까?
하긴 사람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후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그 첫 결과는 살인이었다. 아벨은 의인이었으나 그의 형 가인의 손에 죽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벨이란 이름의 뜻이 헛되다는 뜻을 가졌다. 다들 불안에 젖고 두려움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는 이 때에 나는 새삼 솔로몬의 증언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곧 그러한데도 지혜란 무엇이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다복하여 두 자녀를 두고 각각 부부가 박사 학위를 가지고 나름 자기 몫의 삶을 다하며 살거나, 본의 아니게 자꾸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내 인생이 이렇지 뭐’ 하는 식으로 자신을 비하하며 괴로워하는 누구나… 그 모든 게 헛되고 헛되다. 그러니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말하고 싶은 요지는 딱 두 개로 정리된다. 하나는 인생의 허무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 다른 하나는 주어진 데서 행복하게 살라는 것.
주를 경외함이란 두려워할 줄 아는 일로 하나님을 우러르며 공경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에 이르러 나의 구원자이심을 알고 아뢰고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삶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 도리어 우리의 행복이라는 사실인데, 그럼 다시 돌려서 헛되고 헛된 인생을 어찌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1. 헛되고 다 헛될 뿐인 세상에서 우리가 행복을 누리며 당당하게 사는 비결은 영원을 사모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지으셨다. 아름다운 이유다. 그러므로 때를 거스르는 것은 추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젊을 때가 있고 늙을 때가 있고, 병들 때가 있고 건강할 때가 있고,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1).” 하고 솔로몬은 그 때를 열거하면서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11).”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애쓰고 수고하면서 얻는 것은 이 땅에서의 수확과 결실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는 일이다. 이를 또 교묘하게 역이용하여 죽었다가 살아난 누구 이야기나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천상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거나 영화로 만들어 상품화하거나 그 모든 것에 현혹될 것이 아니다.
특히 요즘 신천지의 이단성과 사이비적인 광신적인 자세로 인해 새삼 주목 받는 우리의 믿음이 덩달아 어처구니없는 맹신으로 매도되고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저마다의 주장이 각각의 지지와 근거를 가지고 들풀처럼 일어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안 믿는다는 사람들도 영생을 말한다. 그럴 때도 우리의 기준은 오롯이 말씀이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우리는 우리로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는 이가 터무니없는 삶을 살도록 하신 게 아니다. 오늘 당하는 이 모든 것들을 견디게 하신다.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신다. 곧 헛된 세상에서도 개의치 않고 우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영생에 들어가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이를 사모함이 우리의 자랑이다. 이 땅에 없는 세 가지,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만족함이 없고, 새 것이 없고, 기억됨이 없는 허무한 가운데서 영생의 삶이란 만족함을 누림이고 모든 것이 새롭고 날마다 우리는 주와 더불어 영원히 기억됨이다. 그래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18-19).”
2. 그처럼 지금은 헛된 세상이지만 여기서 보람되게 살 수 있는 것은 선을 행함으로 기쁨을 누리고 맛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전 3:12).” 이는 무얼 대단히 엄청난 것으로, 누구처럼 일생을 샌들 하나만 들고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은 살지 못한다 해도… 내게 두신 일, 누가 오기로 하여 저와 나눌 말씀을 준비하고 같이 점심으로 먹을 것을 마련하고 먼저 가 기다리는데, 오늘은 피곤해서 쉴게요, 하는 문자 하나로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 된다 해도!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러니 어쩔 것인가?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신 일이다.
여러 마음이 교차하다 그러려니…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뭐라 하지도 못하고 묵묵히 또 그러고 마는 것은,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이를 위해서도 말씀을 주셨다. 덕분에 저가 안 오는 토요일은 헐렁하였고, 나는 지금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었다. 아이가 오후께 복싱자격증을 땄다며 사진을 부쳐왔을 때 같이 기뻐하고 축하하고 격려하며 위로하는 일, 우리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뭔가 대단한 어떤 일에 관여하고 돈을 엄청나게 출자하고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런들,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기 십상이고,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선이란 온전히 주를 바라는 일이었다. 선을 행할 때 아무리 세상이 허무해도 넉넉하게 기쁨으로 지낼 수 있는 것이다.
3. 헛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작은 것에 감사하고 평범한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 일이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3).” 곧 날마다 되풀이 되는 일상이 때론 지겹고 늘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것 같으나, 내가 내 발로 걸을 수 있는 것과 내 몸을 움직여 주어진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그 자체로 얼마나 큰 감사인지! 어깨 인대파열로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있는 손위처남을 아내와 딸애가 문병을 갔다. 일주일째 팔을 못 쓰게 하고 묶어두고 있으려니 얼마나 좀이 쑤시겠나? 우리 일상의 그 사소한 것들이 실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감사요, 영광이요, 놀라운 기적의 축복들이었음을 날마다 안다면 그보다 더 기쁘고 복된 날들이 어디 또 있겠나? 먹고 마시고 일하는 이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은 나날을 하나님의 선물인 줄 알고 사는 삶이 귀한 것이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실 때의 이 말씀보다 더 큰 감사의 이유가 또 있을까? 범사에… 시시한 것들로 여기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그러려니 여기면서, 뭔가 대단하고 화려하고 근사한 것만으로 선물을 상상하는 일은 그 나머지 90%의 생은 심심하고 허탈할 뿐이니. 오늘도 이처럼 아침을 주시고 일어나 앉아 말씀을 앞에 두고 묵상을 하며 글을 쓰고 딸애 아침상을 봐주고, 어떠하든 내 몸을 움직이며 할 수 있다는 이 습관적이고 소소한 것들의 아름다운 선물을 누리는 것이 헛되고 헛된 삶을 이겨내는 비결이었다.
오늘 부스 사람 엘리후의 말은 그렇다 치고, 늘 주께 향한 다윗의 기도를 읊조리며 되새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시 60:1).”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이심이로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