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
욥기 33:13-14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시편 61:3
어려운 시국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방패가 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 곧 나의 방패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마음이 정직할 수 있는 길은 회개다. 만일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12).”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정직한 자이다. 실제 우리의 방패는 ‘감사와 찬양’이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데 어찌 감사하고 무엇을 찬양할까? 이는 ‘하나님의 의’를 따라 감사하는 일이다. 그 지존하신 이름을 찬양하는 일이다.
저는 광야길 같은 인생에서 우리를 아버지처럼 안고 이곳까지 이르게 하신 분이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신 1:31).” 말씀을 전하는 것이 고로 내게 하시는 말씀인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은 아이와 뒤늦게 억지로 와서 뚱하니 있는 아이를 두고 이런 소릴 해서 뭐하나 싶은데, 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던 시절에도 하나님은 나를 이해하시고 기다리시고 보호하시며 용서하시며 앞서 먼저 가셨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30).” 그때와 같이 ‘이제도 나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나의 방패는 이처럼 확실하다. 나는 이를 전하였고, 그 말씀은 고스란히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었다.
아무래도 약이 늘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안과 두려움은 엄습하고 있다. 오후께 누가 전화를 하였다. 모처럼 길게 통화하는 동안 저 역시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에 대해, 우리는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 두려움을 없애거나 불안을 느끼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럴 수도 없지만 그러려고 하는 일이 더 큰 불안과 두려움을 조장할 뿐이다. 다만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먼저 영원을 사모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저마다 품는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말씀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의 상상은 영감이다. 우리 안의 주의 영이 사모하게 하시는 마음이다. 다음은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12).” 여기서 선은 의를 위하여 그것으로 뭔가 보장을 받으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받은 자로서 되돌려드리는 우러나는 마음이고 자원하는 심령으로다. 이 모든 것이 드러나는 현장은 소소한 일상에서다. 대수롭지 않고 별 볼일 없는 것 같았던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13).”
왜냐하면 앞서 ‘모든 게 다 때가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8). 이는 성경의 기본 핵심이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곧 오늘 날 우리의 위기는 우리가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다. 자신이 버러지 같은 존재인 것을, 그런 나를 구속하신 이가 계심을, 그런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사 41:14).” 아, 이와 같은 말씀으로 안도할 수 있는 게 우리의 특권이 아니겠나? 하나님은 합당하시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곧 오늘 우리에게 허용하시는 고난으로 우리는 온전하게 된다. 더욱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 복이다. 누구는 도피처를 구하고 누구는 보험을 계산하고 누구는 더 안전한 길을 도모할 때에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삼하 14:14).”
그 하나님께 나의 방패가 있다. 그 하나님이 나의 방패이시다. 나로 마음이 정직하게 하신다. 나의 정직은 회개다. 내가 죄인 것을 고하고 아뢴다. 주께서 어떻게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셨는지,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품에 안아 옮기신 것처럼 하셨다. 조금만 눈을 들어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0-31).” 마치 우리가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구하고 바랄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모든 때마다 우리를 증인으로 세우신다. 나의 하찮은 인생에서도 하나님이 어찌 관여하시고 인도하시고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는지를 나는 기꺼이 누구에게 들려줄 수 있고 그와 같은 고백으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다.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말씀을 내게 열어두시는 것이다. 아무리 내 생각이나 기준이 뚜렷하다 해도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곧 오늘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오늘 아침 이와 같은 말씀을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은 관심이 없도다(욥 33:13-14).” 감히 우리가 뭐라고 하나님을 운운하고 그의 하시는 일을 논할 수 있겠나?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사 10:15).” 또는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사 45:9).” 그러할 때 우리는 입을 벌려 함부로 말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잠 5:2).” 일련의 상황을 두고 우리가 설왕설래할 일이 아니다. 차라리 그 입 다물고 주가 하시는 일을 보자. 말씀을 묵상하고 늘 항상 곁에 두자. 나는 누구에게 말하여주는 것인데 그 증거는 고스란히 나를 향하고 계셨다.
무엇보다 복된 일은 말씀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나는 누구에게 이참을 이용해서 성경을 한 장씩이라도 읽는 시간을 갖자. 그 말씀을 써보고 되새겨 오래 음미하며 묵상하는 습관을 갖자. 그동안 그럴 시간이 없다고 그처럼 한탄해하더니 그럴 수 있는 시간을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고 위로하지만 저는 그게 제일 어려운 것이다. 알기는 아는데 그럴 시간에 자꾸 뉴스를 보게 되고, 사람들 댓글을 살피고, 심지어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유튜브를 뒤져서 보고 또 보는 일은 하면서도… 가만히 주가 하시는 일을 묵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이보다 쉬운 일이 없는데도 이보다 불가능한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꾸 뭘 하지?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염려에 시달리고, 그러다 괜한 소식에 귀 기울이며 덩달아 공포를 끌어안는 꼴이었으니… 어쩐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하는 말씀보다 더할 수 없이 귀한 방패가 또 어디 있겠나? 나는 누구의 염려를 들어주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안다. 그래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 자꾸 극단적인 생각만 든다. 내가 이러려고 살았나, 하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힌다. 더 외롭고 공허하고 불안하다. 이어지는 저의 말에도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곁에 말씀을 두고 그 말씀을 펼칠 생각을 않으니까… 무슨 말을 더한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확한 문장의 말씀이 일흔한 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행하리라.” 하시는 명확한 문장의 말씀도 열두 번이나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그 중에 아무 말씀이나 펼쳐도 위로가 된다.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나를 붙드시는 말씀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요즘은 성경도 앱으로 있어서 또한 그 구절구절의 말씀을 얼마든지 쉽게 찾아보고 검색할 수 있어서, 마음이 없지 말씀이 없지는 않다.
결국 알면서도 못하겠다고 하지만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일이었으니, 그러는 시간에 유튜브를 뒤져보고 누가 떠들어대는 말에 같이 그때마다 부화뇌동하여 반쯤 늘어진 몸처럼 마음도 심령도 우리의 방패 되시는 하나님과는 거를 두는 것이다. 어쩌겠나? 우리의 고백은 다만 한곁같지 않던가? “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단 2:20-22).” 그러니 나는 오늘도 말씀에 ‘아멘’할 따름이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시 6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