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전봉석 2020. 3. 1. 07:21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욥기 39:19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 67:7

 

 

주기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 코로나19에 앞서 메르스나 신종인플루엔자와 사스가 있었다. 그 주기가 가깝고 돌연변이를 일으킨 병원균이 인류를 위협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39:19).” 모든 만물이 주의 손에 있다.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13).” 그 무심함에 대하여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흙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모질게 대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고생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14-17).”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주관하심 가운데 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교회에 나갔고 누가 오지 않았으나 전화로나 문자로 함께 하였다. 저의 고독과 외로움에 대하여는 본래 육신을 입고 사는 사람으로서 당면해야 하는 쓸쓸함이 있고, 사명자로 사는 일에 따른 고독감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외로움은 하나님이 없어서 겪는 외로움과는 다르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본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 나타나고 있었다. 바울은 나이 들어 로마감옥에 갇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저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감추지 않았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 4:9).” 하는 이 한 문장에서 진한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가령 누구는 몇 주째 혼자 있다. 며칠째 밖을 나가지도 않았다. 그런 저에게 외로워하지 마라, 고독해하지 마라, 하고 말해줄 수는 없다.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그 외로움에 대하여는 나도 다를 게 없어서 신학을 다시 하면서, 이처럼 혼자 늘 있는 일이 이제는 익숙하여졌으나 그때는 무엇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늘 사람이 좋아 사람들과 어울리고 저들과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졸지에 들어앉아 있는 꼴이 되었으니.

 

그러나 우리의 외로움과 고독은 하나님 없이 겪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 마음에 모시기를 싫어하는 고독은 절대적인 것이다.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고독감으로 저들은 더욱 더 고급스럽고 호화스럽고 찬란하게 꾸미고 누리고 다독이며 살지만 절대적인 만족감이 없다. 각종 보양식에 온갖 사치에 환각과 호화로운 파티에 섹스와 중독을 일삼다 이내 자살까지도 불사하는 저들의 고독과는 다르다. 그 고독은 삶의 의미가 없는 고독이다. 하나님 대신 대용품으로 만족감을 누리려하지만 유행이 지나기도 전에 변덕이 들어 사라지기 일쑤다. 영원한 만족되신 일시적인 쾌락과 자기주술적인 만족으로 동성애도 좋고 다중성애도 마다하지 않으나 그 나중은 다 허망할 따름이라. 우리가 느끼는 고독은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육을 가지고 있는 동안 느낄 수밖에 없는 상대적인 고독이고 외로움이다.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딤후 4:21).” 그 춥고 외로운 계절이 오기 전에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11).” 이처럼 상대적으로 느끼는 고독감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 해도 겪는 것이다. 다윗도 그러했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25:16).” 그와 같이 바울도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분명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1-12).” 그 주께서 자기 곁에서 자기에게 힘을 주실 것을 알았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4:17).” 곧 저들의 고독은 하나님이 없어서가 아니다. 믿음이 좋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게 아니다.

 

나는 토요일에 오는 친구에게 통화로 위로하고 격려하다 문득 생각하였다. 무조건 이 외로움을 견디고 이겨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 그럴 수도 없지만 그러느라 소진되는 마음이 더 큰 것이다. 심지어는 이를 왜곡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독을 즐겨야 한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은둔을 하고 외톨이로 지내야 할 것처럼 일부러 그리 또 자신을 쳐서 그것을 의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그렇지 않다. 바울은 이를 개선할 수 있는 것이면 그리 하려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먼저는 믿음의 동료들과 교제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 또한 그 처한 그 환경을 바꾸고 적응하려 하였다.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그리고 읽을 만한 책들을 부탁했다.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성경을 원했다(13). 그냥 그러려니 하고 가만있었던 것은 아니다. 믿는 사람들과 어울렸고 추위를 대비하였으며 책들을 읽었고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 성경을 읽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데서 오는 상대적인 고독도 있다. 기껏 수고하고 애써 믿음의 사람으로 교제하던 데마가 떠났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그때에 오는 외로움과 당혹감은 이루 말할 길 없다. 그리고 함께 하던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저들은 새로운 사역지로 파송되어 떠났다(10). 그처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12).” 그러니 혼자 남겨진다는 일은 앞서 같이 있을 때와 달리 상대적으로 느끼는 고독이 대단한 것이다. 그게 어떤 일로든 외롭다. 슬프고 고독하다. 저는 이와 같은 사실을 가감 없이 기록으로 남겼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도 전했다. 이는 믿는 자들로도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사는 일이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훌륭하다 해도 누구나 외롭고 누구나 고독하다.

 

나는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오는 친구가 코로나 사태로 인해 꼼짝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 드는 외로움과 고독에 대하여 감히 그 마음을 헤아릴 수조차 없다. 저는 혼자이고 장애인 보육원 출신으로 사회적으로 겪는 소외감과 괴리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그 이상의 고립감을 줄 수도 있을 거였다. 나 역시 아무도 없는 교회에 나와 양지바른 창가에 앉아 혼자 있는 시간이 결코 외롭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저마다 우린 상대적인 외로움과 고독을 안고 산다. 이를 위해서도 기를 쓰고 세상을 사랑하고 그 문화에 몸을 실으려고 하지만 상대적으로 또한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는 고독감도 엄청나다. 굳이 내가 멀리하려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전에처럼 즐겁지가 않으니, 그렇게 붙어 다니던 친구나 저와 함께 어울려 관심을 기울이던 즐거움들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일이어서전에 갖았던 즐거움을 더는 느낄 수 없을 때의 상대적인 박탈감에 대하여! 또는 함께 하던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데 따른 외로움에 대하여! 그러니 누구의 고독이 더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으로 사는 동안 이 땅에서 느껴야 하는 고독은 엄연하다.

 

다윗도 외로움을 호소하였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25:16).” 그 외로움이 오죽했으면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102:7).” 그런 저가 정말 하나님이 없어서 외로운 게 아니었다. 믿음이 좋은 바울이나 다윗도 다를 바 없듯이 우리가 육을 입고 사는 동안에 느껴야 하고 감당해야 하는 고독은 항상 끔찍할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결코 의미 없는 싸움은 아니다. 이를 부러 찾아서 즐기며 그것을 선으로 둔답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외로움을 통해 놀라운 즐거움을 배우게 하신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5-6).” 곧 오늘 우리의 외로움은 주를 더욱 바라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회피하려 또는 극복하려고 향락을 좇으면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과 다를 게 없다.

 

나는 어김없이 교회에 나가 혼자 있는 동안에 누구와 통화를 하고 또 누구와 문자를 하면서 이러한 심정으로 저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내가 되레 위로하심을 받았다. 때론 혼자 있는 시간이 참 힘들다. 그러나 그 시간은 도리어 주를 바라는 데 간절하게 한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67:1-2).” 육신으로 인하여 느끼는 고독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위로와 인자하심을 세밀하게 느끼게 한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5).”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6).” 이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고 스스로 얻으려 해서 취한 것과도 다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