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전봉석 2020. 3. 5. 06:57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잠언 1:32-33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시편 71:5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나는 마음을 졸인다. 누가 교회를, 그의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할까하여싸잡아 기독교를 욕하게 될까하여. 앞서 구원파 유병언의 감언이설이 드러나는 데 세월호가 희생되었고, ‘만민성결교회가 밝혀지면서 이재록 목사의 추행이 드러나 여러 사람이 수치를 당했다. 이번에 신천지의 점조직화된 이단성과 기존교회에 대한 공격적인 포교와 그 실체인 교주 이만희가 밝혀지면서 온 나라가 코로나전염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와 같은 실체를 볼 때마다 지혜가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1:20-21).”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들을 귀 있는 자가 따로 있다. 더 큰 외침과 더 끔찍한 신음소리가 메아리쳐도 들을 수 없는 귀와 바로 볼 수 없는 눈은 여전하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22).” 나는 종종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들의 입이다. 그때마다 떠벌여대는 말과 말 사이에서 사람들의 안이함과 무감각함이 무섭다. 부디 지혜는 외친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23).” 오늘 이 일련의 사태는 엄중한 경고다. 표징이고 앞으로 있을 더 큰 재앙의 시작이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24:6-8).” 정작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일은 지금이 아니라 그 앞날이다. 이는 결코 혈과 육의 씨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이 땅의 통치자는 사탄이다. 나는 감히 말하지만 돈을 잘 벌고, 먹고 사는 데 남다른 복을 누리고 싶다면 저와의 결탁이 현명하다. 곧 사람들의 기호를 좇으면 된다. 그 문화를 향유하고 이를 상품화하면 된다. 가령 개인방송채널이 하루밤새 수만 명의 주목을 받으면 거기엔 돈이 따른다. 명예도 얻는다. 대중문화상품이 날로 번창하는 덴 다 이유가 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관심이야 그렇다 쳐도 믿는다는 사람이 심지어 교회가 그와 같은 대중화에 편승될 때, 교회도 성장(?)한다.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하면 교인들도 는다. 교회가 대형화되고 기업화되는 것을 초대교회나 우리 한국 기독교의 부흥과 같은 맥락으로 놓고 보면 안 된다. 어쩜 이단은 그렇게 사람들이 많고 돈이 많아? 하고 누가 물었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그렇다 쳐도 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성장하고 부흥하고 돈도 많고 사람들도 많은 것일까? 나는 그게 더 무섭다.

 

오늘 잠언은 이를 가감 없이 꼬집는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1:24-25).” 이 책임은 우리 믿는 자들의 몫이다.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26).” 두렵고 떨려 주를 더욱 의지해야 한다. , 이러할 때에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32-33).” 말씀을 읽다 섬뜩하게 되는 것이 어느 귀신 들린 자의 이야기에서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12:45).” 전보다 더 악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실제 교회를 등진 자들의 대다수가 그렇지 않던가? 온갖 이유를 대지만 그래서 다시는 교회가 싫다 ,하는 저들에게 나는 그의 완고함에 마음을 졸인다. 한때 그게 나였다. 나는 우리 하나님이 싫었다. 남들 하나님이 좋았고 그때마다 이상하게 믿는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포진되었는데 저들은 별도의 자기들만의 하나님을 따랐다.

 

보편적이고 그저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종교의 하나로 사는 데 따른 평안을 주는 정도에서의 하나님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이들의 삶은 윤택하였다. 가장 친하게 지내던 의사 내외가 그러했고, 어느 중소기업 사장과 그의 처가 그러했고, 나의 선생이 그러해서 저들은 정말 잘 먹고 잘 살았다. 뭘 해도 잘 되었고 어디 부동산에 투자하면 영락없이 이익을 보았다. 그러니 성경의 하나님은 무색하였다. 나는 그 하나님을 피해 저들의 하나님 또는 그 보편적인 하느님을 바랐었다. 있어서 좋지만 굳이 다른 무엇이어도 상관없는 그때 우리의 신은 그 정도이면 족하였다. , 그때 죽었어도 할 말이 없을 부끄러운 인생이었는데, 오늘에 이르러 주를 바로 알고자 할 때,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2:14-16).”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가 되셨다. 혈과 육을 입고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다. 곧 나의 죽음을 대신 감당하심으로 한평생 종노릇하던 나를 놓여나게 하셨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나 같은 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붙들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오늘 우리가 겪는 일련의 환난과 시련을 주가 모르시지 않는다. 단지 표피적인 고통과 두려움이 전부가 아니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5:1-2).” 요즘 가정예배로 같이 읽는 히브리서에서 그 음미하는 말씀이 귀하다. 우리 주님은 완전한 신이면서 완전한 사람이시다. 저는 여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하늘로부터 오셨다. 수천 년을 거쳐 지켜온 교회의 교리가 한낱 허황된 몽상가의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저들의 필요와 두려움을 채우고 역이용하여 세를 불려가는 일은 어쩌면 이 시대에 당연한 현상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7:22).” 정작 온전한 믿음과 신앙을 지키는 일이 그처럼 주목 받는 생은 아니다.

 

나는 외려 쇠퇴한다. 아무리 해도 소용없는 것 같다. 아픈 아이는 아프니까 그렇다 치고, 그쯤 양육하고 가르쳤으면 귀가 열리고 마음을 돌이킬 만도 한데또 보면 공염불이 되었다. 실패뿐이다. 마치 난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만 같아 좌절이 밀려든다. 그럴 때면 의기소침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싶다. 어디로 멀리 떠나고 싶다. 그러나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4-5).” 곧 이 모든 게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하신 것임을. 그런 거 보면 복음에는 갈급함과 분개함이 동시에 있는 것 같다. 감동도 있지만 부끄러움도 크다. 거룩은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다. 이처럼 치열하고 갈급하며 절실하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14).” 그러니 우리는 무엇으로 집중하는가?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71:5).” 오늘 말씀은 이를 다시금 깨닫게 하신다.

 

고로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