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잠언 5:21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편 75:7
긴지 짧은지 가 봐야 안다. 끝까지 끝이 아니고 끝나도 끝이 아니다. 이 모든 게 주의 눈앞에 있다.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잠 5:21).” 하는 말씀 앞에서 안도한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7).” 우리가 이루려는 게 아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말씀 가운데 길이 있다. 말씀을 의뢰하는 마음이 보배다. 그리 두신 믿음이 귀하다. 결국 복이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다.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가 증언하기도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오늘 잠언의 교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사는 일이 귀하다.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22).” 이로써 하나님께 돌아간다.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26).”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다른 무엇 특히 돈을 사랑하는 데서 가진 것에 족한 줄 아는 것이 선이라고 하였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주를 바람으로 주께서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심을 안다. 이는 기이한 일이다. 오늘 시편의 아삽이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나는 이제 기이하신 주의 도우심을 얼마든지 내 삶에서 찾아 증거할 수 있다. 주일 날 우리는 이와 같은 증거를 몇 개라도 서로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시 9:1).” 그리하여 오늘 여기까지 인도하신 이의 품은 아버지가 자식을 안고 인도하신 길이었다는 모세의 증거와도 같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신 1:31).”
저에게 광야는 물론 일반인보다 더 외롭고 고독하고 심지어는 같은 민족들로부터 위협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으면서도, 자기는 아들을 안은 아버지의 품 같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니! 첫째는 애굽에서 종노릇할 때 어땠나? 하는 것이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30).” 이는 모든 성도의 공통된 간증이 아닐까? 부끄럽고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내가 하나님을 멀리하며 세상에 종 되어 살았을 때에도 하나님은 늘 나보다 앞서 모든 일을 행하셨다.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셨다. 아,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떤 사람과 또는 무슨 일 때문에 심지어는 다시 돌이켜 목사가 되기까지의 여정에서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33).” 그때마다 돌보시고 함께 하신 이에 대하여 그 기이함을 찬양할 수 있다. 복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사는 일이 귀한 까닭은 다시 엘리바스의 말로 정리해보면, 첫째는 전능자가 나의 보호자가 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욥 22:25).” 둘째, 이는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이 된다.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26).”
좀 어때요? 하고 토요일에 성경공부 오는 친구가 모처럼 안부를 물어왔을 때, 불안하고 두렵고 여느 때보다 안정제를 의존하는 일이 많으나 그럼에도 괜찮다, 감사하다 하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다. 셋째, 나는 이를 살면서 응답을 받는다.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27).” 그러므로 넷째, 세상이 말하는 형통과 다른 형통을 누린다.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28).” 이는 주가 이루어 가시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다섯째, 이로써 주가 높이신다.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29).” 다시 말하면 나는 누구들처럼 누구를 구원하려 하지 않고, 교회를 부흥시키려 하지 않고, 사람들을 끌어다 선동하거나 종용하지 않고, 그러기 위해 또 다른 궁리니 이슈에 이슈를 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모두는 주가 하실 일이라. 나는 다만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하나님이 죄에서 건지신다.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30).”
그 증거 중 하나가 전에 즐기던 것, 의지하고 함께 하기를 좋아하던 것, 추구하며 보람을 느끼고 더 나은 것을 바라던 것들로부터 자유하다. 이를 예수님도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증거라고 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 이는 당연한 것으로 믿음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 안의 자유는 그 증거가 된다. 누구에게 말하길 저가 온통 처가 식구들만으로 같이 주일을 지키고 교회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 부담을 느끼는 것은 여전히 자기가 꿈꾸는 목회가 있어서이다. 나는 이제 그것으로부터 부자유스럽지 않다. 아내만 있으면 어떻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아이 하나면 또 어떤가? 나는 이 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심을 안다. 곧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하려고 기를 쓰는 게 이단들이고 사이비는 그것을 조건으로 내걸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구원을 이루는 조건으로 더 나은 나라를 만드는 헌신으로 억압한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다. 신념과 믿음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누구보다 믿음이 좋은 것으로 치면 사탄이 최고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가장 종교적이었던 왕이 사울이었고, 그 헌신과 노력으로 투쟁하듯 따랐던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갸롯인 유다가 아닌가? 결국 우리의 열심이 우리를 죽인다. 다만 믿음은 선물이라. 송구할 따름이다. 어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겠나?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다시 말해 자유롭지 못하면 것도 아들이 하시는 일이다. 그럴 리 없으나 그게 맞다. 내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뭘 잘 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분명히 하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걸 그냥 헌신과 노력으로 이루어야 하는 무슨 숙제처럼 짊어지고는 죽어라 하고 포교를 하고 누구를 이끌고, 하나라도 더 명 수를 채워야 상급이 따르는 것처럼 구는 미친 것들에 대하여….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지 밖에 있으면 안 된다. 예수를 죽이려던 사람들이 누구보다 말씀을 잘 알고 그것으로 살던 사람들이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37).”
말씀은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나와 하나님 사이의 담을 허무셨다. 그리고 죽으시기까지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16).” 그러니까 내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거나 이루어질 일이 아닌 것이다. 누구를 그리 가르쳐서도 인도해서도 안 된다. 그러할 때 우리의 소망은 소박하며 절실하고, 지극히 단순하며 간절하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그런 걸 무슨 영웅이 돼야 하는 것처럼 선봉에 서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현혹하며, 기를 쓰고 교회를 확장하고 사람들 세를 불리고, 가시적인 성과로 판단하고 보상 받기를 바라는 꼴들 하고는! 그저 우리는 단순하고 소박하고 가장 절실하고 간절하여 나의 남은 생을 모두 걸고도 이를 지키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저는 나의 빛이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다음은 저가 나의 구원이시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그리고 저만이 나의 생명이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나 비록 하나도 자랑할 게 없고 내어놓을 공로가 없으나,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더 무얼 바랄까? 그리하여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