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전봉석 2020. 3. 15. 06:08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잠언 11:30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편 81:1

 

 

꼼지락거리듯 억지로라도 성경을 쓴다. 글을 쓰고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아이의 글이 올라올 때면 카페에서 알림이 뜬다. 억지로라도 하다 보면 그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격이 되고 인격은 저의 숙명이 된다. 이를 성경에서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연단을 인격으로 두고 이해하면 같은 맥락이 된다. 혼자 있는 시간이 고역이라. 누구와 통화하다 그리 말해주었다. ‘코로나19’로 서로의 생활이 바뀌고 있다. 억지로 하느니 안 하는 게 낫다는 말도, 그럼 아예 안 하게 되는데 괜찮겠나? 가끔 우린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과 하기 싫은 일이 뒤엉기는 것을 느낀다. 가령 저는 혼자 있는 시간에 평소 미루던 말씀 보는 시간을 갖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게 그런데 쉬운가. 한두 장 읽다 포기하기 일쑤니 그것도 성령이 하게 하셔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하더니 것도 자기 의지처럼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저의 말을 듣다 억지로라도라는 표현을 썼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4:17).” 뿌리가 내려지는 과정은 엄연히 치열하다. 그 여린 것이 땅을 뚫고 돌부리를 지나 뻗어 내리는 일이 녹록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비가 내리고 흙이 헐거워졌을 때 땅은 길을 터주고 뿌리는 뻗는다. 새순이 돋고 가지가 자라는 것도 같은 의미다. 땅은 겨우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3월의 흙은 헐거워져 해가 들고 봄비를 머금으면서 온순해지면 여린 새순은 땅을 뚫고 자라나 가지가 굵어진다. 이를 바울은 환난이 우리로 인내하게 하면서 인내를 통해 우리의 인격은 온순하여져 연단을 겪으면서 연단되는 마음은 새 소망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도 뿌리를 두고 있을 때의 일이니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1:1-3).” 결국 우리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였다. ‘억지로라도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려 할 때 성령이 함께 하신다.

 

성령이 함께 하심을 어찌 알 수 있나? 하고 묻기에 언제부턴가 재밌어진다고 말해주었다. ‘재밌다.’는 형용사는 그 의미가 즐겁고 유쾌하다는 뜻이다. 형용사는 말 그대로 상태나 모양인데 이를 느낌으로 아는 말이다. 이를 곧이곧대로 설명하는 일은 어렵다.’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범위를 너무 넓게 갖는다. 그 정도를 아는 일은 전적으로 개별적이어서 주관적이다. 나는 누구와 오래 통화하며 그 같은 고민과 같은 말에 사로잡히는 저의 근심과 염려를 위로하였다. 늘 역설적이게도 환난으로 소망을 배운다. 고통의 그림자가 구원을 사모하게 한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9:2).” 어두운 구석은 점점 더 어둡기를 바라지만 빛이 비추일 때 그만큼 물러가는 어둠의 속도는 허망하다. 아침마다 오는 아이는 다음 주부터 어디에 취업이 되어 출근을 한다. 지난 주간 잠언을 하루 한 장씩 쓰던 것을 오후까지 있으면서 몇 장씩 쓰게 하였다. 한동안 잠언 쓰기가 어려울 텐데 31장까지 마무리를 하고 일을 시작했으면 해서이다. 아픈 아이네, 정신이 온전치 못하네, 다들 이런저런 선입견으로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가장 온전한 영혼이다. 그냥 흘겨 듣고 그러려니 하고 말 줄 알았는데, 어제 토요일에 집에서 혼자 뭐하나 했더니 잠언을 31장까지 다 썼다! 벌써 세 번째 완필이다.

 

억지로라도라는 표현을 바울의 음성으로 들으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나는 같은 의미로 읽는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려주었더니, 말을 바꿔 형도 그럴 때가 있어요?’ 하고 묻는다. 마흔다섯씩이나 먹고 애 같기는 똑같다. 누구나 사람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다 같다. 나는 그리 말해주었다. 가령 아침마다 묵상글을 쓰는 일도 열에 아홉은 억지로라도한다. 물론 우리는 자원하는 심령으로 해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하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51:2).” 다윗의 기도는 절규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저가 이 시를 짓는 데는 훌륭한 영성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남의 아내와 동침한 후 발각되어 쓴 것이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1).” 우리는 이내 사람이라. 사람으로 사는 동안에는 별 수 없다.

 

억지로라도나는 늘 정시에 출근을 하듯 글방으로 간다. 그리고 억지로라도정해진 시간에 앉아 아침에 쓴 글을 읽거나, 책을 읽거나 메모를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 행할 때 더해주시는 즐거움과 유쾌함이다. 곧 재밌다. 어쩔 땐 이런 책이 왜 재미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설명도 할 수 없게 재밌다. 느낌이다. 그 영혼이 그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전에 즐기던 소설이나 놀이나 어떤 즐거움을 마다하게 된다. 즐겨 듣던 음악도, 같이 나누던 이런저런 이야기도, 누구와 어울리던 시간도, 저에 대한 마음도어쩌다 이렇게 됐지? 싶을 정도로 전에 다른 즐거움으로 채워져 가는 것이다. 나는 이를 마흔다섯 된 저에게 설명해주고 싶었고, 아침에 오는 아픈 아이는 이를 증명하듯 토요일 오후에 집에 앉아 잠언을 31장까지 한 장 한 장 써서 카페에 올렸다. 오늘 말씀은 이를 함축하는 게 아닐까?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11:30).” 우리 사람은 더 이상 생명 나무로 갈 수 있는 길이 막혔다. 하나님은 그 곁을 불 칼이 지키게 하셨다. 죄악의 결과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4).”

 

이렇게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께서 그 불 칼을 맞으심으로 단박에 해결되었다. 그 긴 구약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염소와 소와 양의 피로 그때마다 값을 물어야 했던 것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2).” 자 그러니 오늘을 살면서 우리 의인의 열매생명 나무라는 말씀에는 놀라운 함의가 따른다. 더는 그 생명의 나무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 나무가 내 안에 심기어졌다. 그런 자, ‘지혜로운 자의 열매가 사람이다. 먼저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시다. 저가 내 안에 계신다. 그리고 또한 내 안에 두시는 저의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누가 내 안에 가득하다. 혼자 있는 누가 전날에 감기 기운이 있다고 콧물과 기침을 해대서 가슴이 철렁했는데 그날 저녁부터 어제 오전 내내 전화기가 꺼져 있는 것이다. 점심께도 여러 번 전화를 했는데 받지를 않았다. 내가 대체 왜 이 사람때문에 마음을 졸이는가? **야 뭐 하니? 하고 아이에게 먼저 카톡을 하며 토요일 무료한 시간을 어찌 보내는지 묻게 되고, 한 아이와는 꽤 긴 통화를 하며 요즘은 좀 어떤지안타까움과 설렘을 동시에 갖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21:17).” 나는 이 말씀을 그리 읽는다.

 

그러니까 내 안에 계신 이가 내 안에 두시는 마음으로 내가 사람을 얻는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11:30).” 그러니까 믿음의 사람들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의인으로의 열매는 동일하다. 그의 안에 생명의 나무가 자란다. 저는 그리스도이시다. 성령이 내주 임재하신다는 의미는 추상적인 느낌이 아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사람이 증거다. 내가 누구 때문에 신경이 쓰인다. 마음이 아프다. 위해 기도한다. 어찌 지내는가 돌아본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이는 모두 핑계일 따름이다. 극적인 예로 누가 누구를 구했다. 자신도 죽을 뻔하고 살아나서는 오히려 누구는 어떤가 그것부터 묻는다. 곧 우리 주님의 관심은 온통 그러하시다. 그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데, 옆구리에 창이 꽂혔는데도, 오늘 하루 너는 어떠한가? 하고 내게 물으시는 것이다. , 이 하나님의 열심에 대하여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9:7).” 부모님이 오신 날, 여느 때보다 일찍 눈을 뜨고 앉아 말씀을 끌어당겨 앉았을 때 주가 주시는 이 놀라운 느낌은 어찌 형용할 길이 없다. 눈은 아직 졸음으로 시리고, 뼈마디는 아직 덜 깬 것처럼 뻐근하지만 재밌다.’ 조금은 알겠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19:103).”

 

이 모두는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억지로라도하는 그 억지가 실은 순종으로 가는 복종의 첫 발이었다. 나는 우리 고2 아이가 언제쯤이나 억지로라도이 맛을 알까? 기다린다. 간간히 올리는 아이의 글이 너무 무겁고 어둡고 칙칙해서 꼴 보기 싫다가도,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이를 더욱 알고자 하여,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5:8).” 이처럼 억지로라도말씀 앞에 앉게 되는 것이다. 싫지 않은 괴로움이다. 이런저런 우환과 염려와 불안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이때에,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81:1).” 말씀은 말씀하고 계신다.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