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전봉석 2020. 3. 26. 06:58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

잠언 22:19-21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시편 92:5

 

 

어느 때보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가뜩이나 벽을 쌓고 혼자 떠도는 섬처럼 굴던 외따로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도 면구스럽다. 이와 같은 현상을 어찌 읽어야 할까? 오늘 말씀이 그 올바른 길을 제시한다.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오늘의 이 일은 유용하다. 너무 밀착되어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며 살던 시절이다.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곧 오늘의 현상은 지혜의 외침이다. 아울러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읽게 하신다. 이를 듣고 보아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눈과 귀가 막혔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목적은 분명하여서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22:19-21).”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오늘 이 특별한 징조다.

 

이를 바울의 표현으로 읽으면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 9:11).” 주께서 두신 일의 의도다. 그러나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3:13).” 누구는 다만 일상을 그리워하고, 누구는 앞으로 뭘 먹고 사나 염려하느라 여념이 없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기회라! 언제 이처럼 주께 간절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예민하여서 의지와 상관없이 하루를 긴장 가운데 보낸다. 가령 오후께 아내가 와서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가 갑자기 훅, 하고 불안이 또는 극도의 어떤 공포가 밀려와 얼른 숨을 곳을 찾듯 교회로 올라갔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나도 모른다. 누구는 더 죽어라 하고 열을 올리며 돈돈거리고 누구는 늘어져 무기력하며 누구는 태연한 척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고 누구는 더욱 악의적으로 행한다. 살려고 사는 모습이 다들 요지경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8:18).”

 

이는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다.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긴다. 황막해지는 때이다. 그러할 때 시편을 묵상하는 일은 얼마나 유익한지어제는 시편 121편의 말씀을 여러 번 되뇌며 음미할 수 있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그 어느 때보다 도움이 절실 한 때에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는 깨달음과 확신은 틀림없이 은혜다. 아무나 그리 여길 수 없다. 그는 어떤 이신가?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1-2절까지의 인칭이 였다가 갑자기 로 바뀌는 인칭에서 스스로 시인은 자신을 향해 들려주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곧 이스라엘은 주의 것이다. 주의 백성이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이와 같은 말씀으로도 이미 충분하여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지킨다>는 약속이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적으로 거듭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나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도 이미 충분하였다(121:1-8).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어서 노트에 적고 여러 번 읊조리다, 아니 그런데그렇듯 지키신다면서 오늘과 같은 어려움은 그럼? 더 큰 불행과 역경으로 고통당하는 것은 그럼? 실족하지도 않게 하시고(3), 해를 당하게도 않게 하시고(6), 환난을 면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면서(7)그럼 우리 인생에 주어지는 오늘의 고통과 염려와 불안과 공포는 무슨 일인가? 이와 같은 말씀은 영락없이 부당하고 비논리적이지 않은가? 정말 이런 경험으로 산 사람이 있을까? 아브라함이 그러했던가? 노아? 모세? 다윗? 바울? 성경의 그 어떤 이를 떠올려 봐도 이와 같은 말씀처럼 살아간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의 고백은 경험에 의한 나열이 아니고 믿음으로서의 노래다. 마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고백과 같은 의미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17-18).” 실제와 믿음은 거리가 있다. 그럴 수 없는 일상에서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하고 믿는 믿음이 믿음이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2).” 그러니까 앞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대로 그 삶에서 보상을 받고 산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은 것이 믿음이다. 하긴 의당 그럴 거면 굳이 믿고 말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럴 수 없고 그 증거가 뚜렷하지 않는 데도 믿는 것이 믿음이지 않겠나? 곧 시편 121편의 완벽한 형통에 대하여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그렇다는 것에 대한 믿음의 찬양이다. 시편을 묵상하면서 이 놀라운 역설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쓸개와 쑥을 삼키는 것 같다고 표현한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처럼, 그러나 실제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27:34).” 예수님이 나를 위해 마셨다.

 

오늘처럼 혼탁하고 어려운 때에 누가 나의 도움일까? 눈을 들어 산을 향할 때에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다.” 하는 고백 그 찬양 자체로 복이었던 것이다. 아무나 그런 소릴 하겠나? 그와 같은 고백이 결코 누구나의 것이 아님을 되새기며, 내 안에 이는 감사와 감격을 사랑하였다. 말씀은 분명히 언급하셨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 표징으로서의 야곱은 나다. 개별적인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은 주의 백성이다. 오늘 날 우리 모두 믿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시는 말씀으로 눈물이 고인다. 주님, 하면서 송구하고 감사하여 고개를 숙인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139:9-10).” 하는 말씀으로 이미 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시인은 이를 언급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92:5).”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