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전봉석 2020. 3. 28. 07:09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잠언 24:32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편 94:11

 

 

주변의 모든 일은 훈계다. 교훈이며 주를 바라는 생각의 깊이를 더한다. 누구와의 대화에서 또는 내 안에 이는 감정으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24:32).”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더하시는 자세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94:11).” 끝 간 데 없이 부정적이고 죄악 되며 안일한 것이 사람이라, ‘n번방박사방을 보면서 우리 안의 악의 뿌리를 연상할 수 있었다. 아직 어린데한참 꿈을 꾸고 삶을 올곧게 살아가야 할 나이인데상대적으로 나는 저의 순박한 얼굴에 저의 사악한 행각이 믿기지 않았다. 여성을, 그것도 더욱 무참하게 또는 악랄하게 성적 노예로 조종하고 착취했다는 보도를 보면서도 나는 자꾸 저의 순진한 얼굴이 난해했다. 돈을 주고 n번방에 가담한 이들이 수만 명이 넘고, 더욱 더 가학적이고 음란한 것으로 값을 지불하였다고 하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1:24).” 두려운 것은 훈계를 모르는 일이다.

 

인생이 얼마나 짧고 보잘것없으며 의지할 게 못 되는지다윗은 주께 간구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39:4).” 그 때를 잊지 않게 바라였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5).” 특히 선거철이 되면서 저마다의 본색은 드러나고 나름의 기치를 내걸고 자신이 옳다고 해대지만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6).” 과연 저들은 알까?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살아남는 것이다. 누구는 네 번 다섯 번 국회의원을 해먹으면서도 거머리의 딸들같이 만족함을 모른다. 그러니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우리는 또한 그것을 보며 훈계를 받는 것이다.

 

살아온 날을 가만히 돌아보면 까마득한 것 같은데 한 뼘 길이뿐이고, 모질고 험난했던 세월인 것 같으나 지난한 역사와 오늘에 비추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어서모세는 잠깐 자는 것 같다 하고,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90:5).” 욥은 베틀 같다 하고 이를 바람이라 하였으니,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7:6-7).” 다윗은 손 넓이 만도 못하다 하였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39:5).” 셈할 가치도 없는 안개 같을 따름이라. 그러니 저들의 이런저런 악다구니를 보면서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21:6).” 이 모든 게 훈계라.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일이 내게 먼저 유익하였다. 점심시간을 넘겨 아내가 친정에서 돌아오고 모처럼 자전거를 끌고 내려가 멀리 가서 보리밥을 먹고 왔다. 코로나19로 거리의 풍경은 달라졌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로 인해 조금은 조용해지고 한산하였다. 그동안 누리고 살던 일상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하였는지를, 그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얼마나 귀한 보배와 같았는지를, 나는 마스크를 코끝에 걸치고 뜀박질을 하며 장난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매번 교훈은 실패 뒤에 온다. 울음이 먼저다. 설마, 하는 후회에 뒤에 따른다. 이를 성경은 경계하시는 것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17:32).” 더는 되돌릴 수도 없는 때가 이르리니 그때는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뿐이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25:30).” 두려움이 들어야 한다. 그래서 노인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오후께 친구와 모처럼 통화하면서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성경공부도 못하고 있고, 그러니 한편으로는 좋다는 말에 바울의 고백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 순종적이지 못하다. 정직하거나 본래 착한 사람은 없다. 아이도 악할 뿐이어서 잔머리를 굴릴 때면 어느 사업가의 능숙한 거짓말보다 재치가 있다. 오히려 나는 저가 가만히 있을 때쫓겨났던 귀신이 다른 귀신들을 데리고 들어가 전보다 그 형편이 더 악해질까 염려하였다. 안 그럴 거라고 호언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천하의 다윗도 그 모진 훈련과 영성의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음에도 순식간에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였다. 바울은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설마 하나님께 버림받을까를 염려한 것이겠나? 자신이 전한 말씀에서 자신 스스로가 이탈할까 하여 스스로를 쳐서 복종시킨 일이다. 나는 친구에게 억지로라도하던 대로 읽고 쓰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으라고 권하였다. 누구와 성경공부를 할 때는 의무감으로 또는 저에 대한 예의상으로나 하던 일이었다면 그것으로 다가 아니다. 오히려 저보다 더 중요한 이와의 시간이라.

 

믿음이란 아무렇게 저절로 선물이니까 억지로 떠안기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받지 못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저녁에 같이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며 묵상하였던 구절이다. 따라오게 하시지만 따라가야 한다. 하지 않으면 할 수도 없다. 그럼 내 의지로 되겠나? 먼저는 예수님으로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그럴 때 믿음으로 그 사랑을 받는다. 믿음은 느낌이지만 막연한 감상이 아니라 실제의 사랑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그러므로 따라야 갈 수 있다. 예수로 말미암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그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18).”

 

나는 요즘 저녁마다 불안에 휩싸여 잠들기 전에 안정제를 한 알씩 더 먹게 된다. 의지나 생각과 상관없이 저 혼자 휩쓸고 들어오는 불안이라 나는 속수무책이다. 어린아이처럼 몸을 움츠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다 잠이 든다. 또한 누구보다 허약한 체질이고 기질이라, 그래서도 나는 억지로라도 말씀 앞에 앉고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자고 하루의 일과를 소화한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할 때 오늘의 말씀이 위로라.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94:14).” 이와 같은 말씀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값지다. 황폐한 영혼들은 ‘n번방에서 위로를 찾으려하나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17).” 나의 고백은 시편의 것과 다르지 않다.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22).” 저의 것이 내 것이기를 기도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