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언 27:1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시편 97:10
사랑보다 구체적인 것도 없다. 주를 사랑한다 하면서 악을 미워하지 않는 일이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오늘 말씀을 그리 읽힌다. 곧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10).” 돌아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은혜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누구 이야기를 하다 내 이야기로 돌아보면 부끄럽고 송구하여 입을 열 수도 없고 천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일 따름이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 그런 내가 뭐라고 주께서 나를 그처럼 사랑하시고 긍휼을 더하셨는가. 그런 가운데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오늘 하루의 은혜가 족하였다.
늘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처지이나 주의 빛으로 산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시 97:11).” 마치 따사로운 햇볕과 같아서 가만히 걷다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께 경배한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2).” 이와 같은 감사가 복이다. 내 안에 이는 충만함이 은총이다. 그저 세상 것을 위하고 그것으로 위로를 삼으려 하던 시절에는 몰랐다. 애써 친구를 찾고 마음을 더해 더 많은 인정과 지지를 갈구하던 시절에는 그러느라 소진하는 삶의 무게를 알 길이 없었다. 다들 그러고 사니까, 그러는 내가 뭐 그리 나쁜가? 하고 누가 나더러 죄인이라 하면 화가 나고는 하였다. 억울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정예배에 앞서 아내는 문득, 우리 아이들을 이만큼 키워주신 게 은혜라. 얼마나 감사하고 또 송구스러울 뿐인지. 제대로 부모 노릇을 한 게 없고 믿음으로, 신앙으로 양육하기는커녕 늘 변덕스럽고 철들지 못한 어른으로 더욱이 혼란스러웠을 텐데…. 나는 그런 소리만 들으면 눈물이 고인다.
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에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잠 27:5).” 주의 은혜가 귀하다. 누구에 대해 염려하다 저의 어려움을 안타까워하다, 혼자 지낸다는 일이 그 자체로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상상도 가지 않아서 마음이 아픈 정도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럴 수 있는 자가 ‘아무나’는 아니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그러니까 오늘의 이런저런 사태를 겪으면서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나에게 더하신 은혜가 크고 귀한 것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25:21).”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 교회를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서부터 이런저런 문제를 안고 어려움을 겪는 한두 사람씩 붙여 그때마다 함께 하게 하시는 일에 있어서도,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22).” 내가 저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도리어 저들로 내가 주를 앙망한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23).” 내가 더욱 주를 바람은 나의 결단도 의지로도 하는 게 아니었다. 아내는 문득 지나간 날 중에 마음에 남아 수치심으로 또는 부끄러운 죄악을 주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말을 꺼내었고,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에 앞에 주를 바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용서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었다. 고로 누구에게 잘했다, 잘했다 해주는 일처럼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잠 27:21).” 말씀은 나의 길을 주목하시며 겨누어 말씀하신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22).” 어쩔 수 없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좋은 날 보기를 힘쓰라!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시 34:1-2).” 이는 구체적으로 첫째 말의 정도에 있다. 악한 말을 버리고 누구를 겨냥하는 말도 삼가고 오직 ‘내 입술로 항상’ 찬송이 나올 수 있기를, 찬송은 감사다. 둘째는 생각의 질을 높이는 일이다. 항상 부정적이고 악한 생각으로 누구에 대해 판단과 비난이 먼저 일고, 무엇에 대해 원망과 불평이 들어서는 생각을 그쳐야 한다. 셋째는 그러할 때 말이 생각을 지배하고 생각이 말을 고르게 하면서 선을 향하려는 행동의 정도가 드러난다. 이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일로 떠벌이는 구호가 아니라 묵묵히 준행하는 실천으로 말이다. 그러할 때 서로는 화평을 구하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함은 우리 곁에 두시는 이들로의 화목함을 누리는 것과도 같다.
믿는다고 하면서 어디 있든 꼭 불화가 일고 다툼이 생긴다면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주를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내세워 결의하고 다짐하고 이를 구호처럼 외치며 남을 선동하는 자리에 서곤 한다면 그 또한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 믿음으로 우상을 섬기는 게 될 수 있고 그와 같은 확신이 숭배하는 대상은 자신이거나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이거나…. 그러므로 복을 이어주는, 화평을 건네는 통로는 동정하는 마음이고 사랑에서며 불쌍히 여겨지는 마음이고 겸손함에서이며, 이 모두는 복음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9).” 안이하고 막연할 때는 미련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잠언은 이르기를,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잠 27:2).” 내가 나를 자부하면서부터 걸려 넘어질 확률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3).” 누구도 그 안에 가벼운 마음은 없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그러므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4-5).” 결코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구호나 낭만의 것이 아니다. 형식적인 구호나 거룩을 도모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러니 참…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22).” 이를 알 때 나는 주의 이름을 되뇐다. 내가 나를 어쩔 수 없어 주의 은총만을 구한다. 나는 결코 나를 의롭게 할 수 없다. 누구보다 나은 믿음을 소유하고 유지하고 선봉에 서서 ‘나를 따르라.’ 할 수 없다. 다 그 놈이 그 놈이라.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19).” 서로 알면서도 명분을 내세워 옳다고 여기는 쪽에 가담한다. 이 말과 저 말이 다르다. 선거철이 되면서 특히 정치인들의 말에서 사람의 정도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 우리는 떠도는 것 같으나 주께 붙들린 사람들이라.
사람들은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7).” 어쩌겠나?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은 멀고 자신들의 손기술은 가까우니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여 섬김으로 저를 하나님이라 여기며 위로를 삼는다는 데야…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왕상 12:28).” 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가운데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10).” 오늘 시편의 말씀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이게 하신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