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언 30:7-9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편 100:5
적당하다는 것, 그것으로 족해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까지도 적당하게 하셨으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지나고 보면 항상 그러했던 것을, 그때마다 은혜가 더했던 것을, 왜 이처럼 번번이 때마다 조바심내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일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하루마다 다채로운 것 같다. 내 마음의 반응도 그렇지만 저마다의 대응과 그 처지에서의 상태도 그렇다. 가만 보면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어쨌든 하나님 앞에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 16:9-10).” 어떠하든 그리고 어떻든지,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1).”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는 일이다. 좌우지간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들어앉아 아무와도 교류가 없는 것 같으나 또 보면 하루 동안에 여러 일들이 있었다. 어려웠든 싱거웠든 한 날은 그 날의 것으로 족하다. 그러할 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4).” 믿음이란 게 참으로 기이하여서 내가 그리 여긴다고 해서 그것이 아니고, 싫다고 해서 또한 물릴 수도 없다. 그럼 대체 무얼, 어떻게 믿는다는 것일까? 먼저는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 그러니 그를 믿는데 그것은 그의 말씀을 믿는 일이다. 사람도 말이 그의 인격이고 그의 인격이란 말에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격도 그의 말씀에서 드러난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란 그와 같이 말씀을 들음으로 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듣다는 동사는 소리를 듣는 것은 물론 효험을 발휘하는 것과 받거나 맞는다는 자동사와 타동사를 동시에 갖는다. 먼저는 귀로 느껴 아는 듣다, 들었다의 타동사가 있고, 귀를 기울여 주의 깊게 느낀다는 동사도 있다. 이는 또 재밌는 게 방울져 떨어진다는 의미에서 듣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처럼 말씀을 읽다보면 말의 순화과정이 묵상의 깊이를 더한다. 그리하여 듣다는 들어서 ‘받아들이다’에까지 이르러 ‘그리 여기고 이해한다.’는 것에 무게를 싣는다. 곧 바탕을 둬 그러한 입장에 의거하여, 기울여 조금씩 흘러들어가게 하는 일이다(우리말 사전 참고). 햇살 고운 날 창가에 앉아 물끄러미 햇살이 듣는 것을 보면 경이롭다. 이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그림자다. 선이 그러지듯 햇살이 듣는 곳과 미치지 못하는 곳의 경계가 엄연하게 그어지는 것이다. 성경으로 다시 오면 이 모든 날에 성경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이에 누구는 햇살이 들 듯 말씀이 듣고 어떤 이는 선이 그어져 그림자 너머에 있다. 이를 아는 것을 믿음이라 하는 게 아니다. 믿음은 아는 지식 이 이상의 신비다. 아는 일에는 사탄도 능하다.
저가 말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4:34).” 저도 다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이를 믿음으로 오해해서 안 되는 것 중에서는 뜨거운 느낌-충격과 어떤 감동과 남다른 경험이다. 이는 함정 같아서 한 번 빠지면 자기만의 믿음에 함몰되기 십상이다. 정작 믿음이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무모한 말씀대로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기껏 말씀대로 얻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의 그 부당함에 대하여 일체 거론하지 않고 행하는, 순종이 곧 믿음을 가른다. 순종이란 말씀에 응하는 것. 그래서 믿음으로 손에 쥐는 세 가지 말씀이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둘째는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2).” 막말로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믿는 이의 증거다. 바라는 것의 실상이란 눈에 보이는 증서와 같은 것으로, 성경이다. 보증서다. 계약서 같은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의 숨결을 믿는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3).”
머리로도 이해가 안 되고 가슴으로도 느껴지는 게 없다 해도, 가만히 삶을 돌아보면 그때마다 누가 있었다! 함께 하셨다! 그럴 때 그런 사람, 어떤 일, 그 결과가 기이하게 여겨진다. 고로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뭔가 대단한 일을 꾸미고 선봉에 서서 주도하고 이끄는 일이 아니라, 이게 뭐지? 하면서도 그리 행하고 있는 일이다. 아브라함도 그리 앞으로 나아갔다. 약속한 아들은커녕 아내는 더 이상 임신할 수 없는 처지에서, 달랑 아들 하나 이삭이 전부였을 때에도, 그걸 또 죽여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에도… 저는 머리로 이를 분석하고 대처하고 대응하지 않았다. 나는 종종 노아의 120년 방주 짓는 일을 묵상하면 경건해진다. 그 기분이 어땠을까? 형편은 또 어떻고? 남들은 그렇다 쳐도 가족들과의 관계는 어땠을까? 저의 광기어린 무모함 앞에 두 아들과 자부와 그의 처는 도대체 얼마나 갈등하고 회의하고 실망하면서도 그 일을 준행한 것일까? 가만히 생각하면 인생이란 결코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다. 쥔 것을 놓기 위해서는 새로 무엇을 쥐고 산다. 심지어 아기는 태어날 때 자신의 탯줄이었을지, 양수였을지 아니면 기를 쓰는 안간힘이었을지 무언가를 꼭 쥐고 태어난다. 사람은 일생을 무언가 쥐고 살다 죽을 때야 손을 편다. 성경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다시 말해 바로 쥐고 살려면 박해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 지혜자는 기도하는 것이구나!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부디 많이 쥐게도 마시고 없이 쥐게도 마시어서 많이 쥔 것으로 하나님을 모른다 하게 하지 마시고, 없이 쥔 것으로 더 쥐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게 하소서. 고로 적당하다는 것, 세상이 결국 세상인 까닭은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 56:11-12).” 그러니 우린 그럼 어쩔 것인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100: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