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도서 4:4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시편 105:3
저마다의 관심이 있다. 무엇을 구하는가, 하는 데서 오늘의 나를 비춰볼 수 있다. 누구는 새로 집을 사서 이를 어찌 꾸밀까,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생각한다. 누구는 건강을 염려하여 먹고 마시는 일에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다. 누구는 기어이 알바라도 뛰며 한 푼이라도 더 버는 쪽으로 갔다. 저마다의 관심으로 잃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을 하였다. 오늘 지혜자의 말을 그리 읽는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4:4).” 애써 수고한들 알아주는 이가 없다. 결국은 자기만족을 위할 따름이다. 불안해서든 외로워서든, 각자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의 경우는 분명히 다르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시 105:3).” 그러므로 무엇을 구하고 살 것인가.
가령 저마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던 시절이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사마리아 땅에도 복음이 전하여졌다. “그 날에” 스데반이 죽고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4). 이를 듣고 사마리아에도 기쁨이 임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8).” 그 땅은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막 9:18).” 그런 곳이 오늘의 여기가 아닌가? 사람들은 농담처럼 귀신 이야기를 지어 만들고, 동방의 현자가 고안한 몸과 마음의 수련을 위한 요가를 건강을 위해 즐기고, 강신술이나 마술로 서로를 현혹하고 이를 버젓이 프로그램에 반영하여 서로가 접신을 꾀하며 키득거린다.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딤후 3:8).” 저들은 박수와 술객이라. 문지방에 부적을 붙이고 새로 시작하는 일에는 ‘알지 못하는 신’을 더듬어 찾아 저의 도움을 구한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누구는 돈이 자식이 명예와 출세가, 그 누리는 권세를 위해서도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려고 하는데…. 지금처럼 전염병이 창궐할 때면 더더욱 미신적이고 신비적인 일에 마음이 끌리게 되어 있으니. 누구는 결국 불안하다는 이유로 일을 찾아 하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함으로 가만히 있어 하나님을 바랄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이는 내가 취하여 그리 생각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누구를 안타까워하다 또는 세상의 이런저런 일들을 가만히 돌아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우리가 주를 바랄 수 있는 것 자체가 은혜였다는 데 감사가 절로 나온다. 평생을 학자로 이성주의자로 살며 후학을 양성하던 올더스 헉슬리는 노년에 신비주의에 사로잡혀 불교도가 되었다. 다음을 생을 기약하며 윤회로의 삶을 추구하다 죽었다. 사람 앞 일은 모를 뿐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내가 이처럼 주 앞에 앉아 주의 도우심을 구하고 바라는 일은 내 의지로만의 일이 아니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6).” 내 안에 두시는 확신이 저의 것이라. 누구더러 뭐라 하며 속을 끓이다가 그와 같은 안타까움이나 괜한 마음만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데서 좌절하였다. 곧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9:11).” 보이는 저의 것으로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닌 것이다.
믿음은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내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은 수시로 드러나는 마음으로도 알 수 있다. 지금에 어디에 있는지, 발길에서도 알 수 있고, 손에 쥐고 있는 일로도 볼 수 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혼자 들어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서성거리듯 산책을 하면서도 나는 누구의 연락으로 또는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서 뭐라 해줘야 한다. 가령 어제는 둘과 오래 통화할 일이 있었는데 하나에게는 그러든지 말든지 마음이 가는 정도가 더는 뭐라 할 게 없었다. 그래봐야 들을 귀가 없다. 그런데 누구에게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야단을 치고 뭐라 나무라고 부디 말씀 가운데 서기를 바라였다. 둘 다 오래 된 사이고, 하나는 오히려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일일 텐데도…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하려고 하는 자에게 채찍도 유용한 거였다.
가만히 창가에 서서 책을 읽는 일은 즐겁다. 비록 허리가 아프고 금세 다리가 저려 오래 서 있지는 못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자주 창가에 가서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는다. 그러다 문들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 너무 평온하여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여겨져 물끄러미 바라보다 낯설다. 여기와 저기의 차이가 막연하여서 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시대에는 하나님 곁에 산다는 일과 세상과 벗하며 산다는 일의 구분이 모호할 따름이다. 누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게 왜 나쁘냐고요? 차라리(?) 몇 푼 벌려고 기껏 알바를 나갔다가 일이 없으니 눈치가 보이고 그러느라 또 뭐라 궁싯거리는 저에게 나는 다시 의미 없는 소릴 하듯 혼자 있는 시간을 훈련해야 한다. 혼자가 아니고 언제 성경을 읽겠으며, 같이 누구랑 떠들고 있으면서 언제 기도를 하겠으며, 혼자가 아니니 그것으로 누구를 의존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바라는 것보다는 막연하지 않을 테니까…. 이 또한 내가 자꾸 뭐라 권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한다고 해본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닐 테고.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성령을 주셔야 할 일이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사 44:3-4).” 기어이 그 목마름으로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껴서야 주의 이름의 단비를 깨달아 아는 일이라면…. 안달할 일이 아니다. 그러자니 모르는 척 무심히 굴어도 되는 것인지, 뭐라 하며 자꾸 야단을 쳐야 하는 일인지, 내 안에 이는 조바심으로 내가 부대끼는 일이어서.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욜 2:28-30).” 주를 바란다. 뭐라 말하다 말하기를 그치고, 무슨 생각으로 시달리다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잠잠히 그 일로 인하여서도 주를 바란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오늘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4).” 그리하여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전 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