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전도서 6:12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편 107:43
하루가 마치 견뎌야 하는 일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하루의 하루가 포개지고 쌓여가 하루는 어김없이 하루 위에 얹혀 하나님의 날은 더해지는데… 때로는 견디는 것으로도 충성이라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또 하루가 어쩌니 해도, 세월은 고스란히 주 앞에 드려지는 것이라.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렘 12:5).” 그저 일상에 젖어 살고자 할 때 말씀은 재촉하신다. 점심 때 잠깐 아내가 친정에 다녀오는 길에 들르는 것 외에 요즘은 그야말로 철저히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가급적이면 누구 일로 마음 어지럽히지 않고, 혼자 뭐 하나 싶을 정도로 들어앉아 같은 날의 연속이라.
어떠하든,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단지 ‘코로나19’ 전염병을 이겨내고, 외로움을 견뎌내고, 어떤 고통을 참아내는 정도가 아니다. 그렇게 천년의 갑절을 살았다 한들?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이와 같은 확신과 그에 따른 견딤은 다른 것이다. 오늘 전도자의 말은 이를 일깨운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전 6:19-20).” 어지럽지 않고 어찌 정돈할 게 있으며 그에 따른 감사를 배우겠나. 그러니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12).”
그러나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 107:43).” 그렇구나!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전 6:7).”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처럼 여겨지나 하루하루가 어느새 다 저물어가는 일이었으니, 오후께 물끄러미 성전을 바라보며 주가 더하시는 하루의 여정을 돌아보았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이를 알게 하시려고 어려움을 놓아두신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전 6:2).”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 이를 깨달아 주의 인자하심을 아는 일이 지혜이다.
총선을 치르면서 주고받는 말과 말 사이에서 나는 그 경계를 알 수 없어 아득하다. 누구의 막말은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하여서 저의 말처럼 그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 어쩌다 노년에 그의 황혼의 때에… 나는 저들의 말이 무서울 따름이다. 아무리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노선이 다르다 해도… 나는 저들의 말의 무게에 눌려 할 말을 잃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예레미야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어떻다 해도, 그러해도 멈출 수 없는 게 하룻길이라. 하루는 가도 또 하루는 오면서 좀 더 나은, 달라지라는 소리가 아니라 예수를 바로 알고 믿으라는 소리로 들린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전혀 새로운 것이다. 보완되고 수리된 정도가 아니다.
그렇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하여 이는 그냥 그러라는 권고가 아니었다. 강권하심이었다. 저의 죽으심으로까지 더해지는 말씀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14).” 그래서 우리는 전혀 다른 피조물이 되었다. 이를 성령이 보증하신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5).” 이와 같이 말씀을 곱씹고 되새겨 그 의미를 살피다보면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이 날의 소중함이 단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전날에도 이어져왔듯이 앞으로도 영원하여서, 이에 화목을 위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18-19).”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신다. 그 사랑으로 점점 더 인도하신다. 그것으로 서로에게 사랑이 된다. 강권하심이란 그저 그러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셨다.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더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일이라. 이를 위해 나를 꽉 붙드셨다. 곧 내가 그의 사랑에 끼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3-24).” 곧 사나 죽으나, 사는 일에나 죽는 일에나, 여기서 ‘끼었다’ 하는 의미가 ‘강권하다’는 의미가 같다.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예수의 사랑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여 사는 삶이란…….
개 버릇 남 못 준다는데, 나는 정치인들의 말의 폭력 앞에서 환멸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동원되는 사람들이다.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희한할 따름이다. 예상 득표율을 보며 그게 더 놀라웠다. 누구나 무엇에 끼어 산다. 붙들려 산다. 강권함을 당해 산다. 돈이 끼이고, 자신의 신념에 끼이고, 자식 일에 끼이고, 명예와 명분에 끼이고, 나름의 희생과 보람에 끼이고… 끼이고 끼여 그에 따른 강권함에 붙들려서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었는데도, 저의 말의 빚은 어쩌면 좋을까? 나는 누구의 말 때문에 기겁을 하다 그것이 어찌 저만의 일이겠나? 싶어져서, 그게 결국은 인생이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의 포개지는 하루가 두렵기까지 하였다.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3, 6, 12).” 이를 장담하는 일보다 어리석은 게 또 있을까?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9).” 말씀 앞에서 혀를 끌끌 찬다. 오직 감사할 것은 오늘 또 허락하신 이 한 날의 하루라. 그 가운데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있나니 그것들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11).” 감사함으로 살자. 혼자이든 여럿이든, 바쁘든 헐겁든,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7:1).” 시편의 말씀으로 이어지는 오늘 아침의 진리가 귀할 따름이다. 전날에는 갑자기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파서 어찔하였고, 누구 때문에 마음이 쓰여 평소보다 약을 두 배나 먹어가며 안정을 도모하였고, 때론 외로움으로 그 고독 가운데서 몸부림치고, 안락하고 안이하여 한없이 늘어지며 나태하게 굴기도 하였으며… 그러니 또 하루가 어떠할지 누가 알겠나? 그런 가운데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2-3).” 감사의 거리는 선명하여서 주 앞에 은혜라. 이에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곧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9).”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