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봉석 2020. 4. 15. 07:09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도서 11:1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시편 112:9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을 때도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로 항상 내 곁에 계시다는 것과 그래서 현실에 일어나는 일의 중요성을 바르게 분별할 줄 아는 것.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사로잡힌 삶의 실제적인 모습을 은유적으로 들려준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1:1).” ‘여러 날 후나는 이미 잊고 있을 즈음에 아무런 소용도 없을 줄 알았던 우리의 선행이 되돌아온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112:9).” 내가 이런들 뭐가 달라질까? 그래봐야 소용도 없는 일인데, 싶은 일에서 보람이 오고 사명이 더해진다. 그러한 마음의 본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었다. 이 관계는 어떤 성장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그리 형성된 일이다.

 

누구는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올곧은 사명감을 붙들어 신념을 갖고 살았는데, 이런 자를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어느 날 내가 잠에서 깨어보니 죽어 있었다.’는 명징한 표현으로 설명하였다. 자기 사명을 붙들고 사는 일이란 그처럼 허망한 것이다. 결국 우리 성도의 삶은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으로 사는 것,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끄시는 손길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였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4).” 그 증거는 이것이다. 첫째, 영의 생각을 한다.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 향하도록 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5-6).” 둘째, 그러할 때 주가 내 안에 계심을 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셋째, 그 삶은 이어져 부활을 삶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 넷째,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악함은 죽고 의로움만이 산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 다섯째, 이로써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진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

 

즉 엉성하고 안이한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했던 지난날이 자유로웠다고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더하시는 사명을 회피하는 가장 보편적인 불순종은 내가 뭘’, ‘어찌 나 같은 게 이런 일을’, ‘나는 아이라’, ‘말을 못하는 자라하는 핑계를 겸양처럼 떤다. 예레미야도 그랬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1:6).” 모세도 그랬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4:10).” 내 안에도 늘 그러하다. 사람의 마음이 본래 그렇다. 시커멓고 기만적이며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다. 그 마음을 믿는 자가 가장 어리석다. 그래서 지혜자는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25:28).” 그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17:9).”

 

그런 걸 다들 자기 마음을 믿고 신봉하고 이를 굳혀 신념과 명분으로 삼으려하니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그러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니 나는 죽어있었다.’ 이 얼마나 황당한가? 누구의 죽음은 의를 이루고 누구의 죽음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다. 선거판의 이런저런 말들을 들으며 나는 치를 떤다. 사람들마다, 정당들마다, 지지하는 세력들마다 저들의 대의명분이 나는 두렵다. 그래서 세상이 무섭다는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10:31).” 어느새 나도 모르는 순간에 이끌려가고 있을 죽음의 강을 연상한다. 파스칼은 이를 위트 있게 진술하였다. ‘만일 두려워하고 있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면 두려워하라.’ 두려움의 역설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주를 경외함이다. 주를 경외할 때 두려워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경탄이 나온다. 감사가 솟구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말하길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일상이 달라질 것이라 하였다. 거창하게 들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실상이 될 것이다. 한데 뒤엉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을 흩으시듯 운집되었던 사람들의 군집은 소규모로 또는 홀로 거리를 두게 된다.

 

전에 누구에게 나는 은연중에 말하였다. 나이가 들어 늙는다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노인이 되는 훈련의 가장 선결과제는 혼자 있는 시간이다. 노년에 텃밭을 일구네, 어디 어울려 남은 여생을 즐기네, 마음은 청춘이라 젊게 사네 하는 따위의 말들은 모두 낭만적일 뿐이다. 실제는 몸이 안 따르고, 자기들 아집으로 남의 말은 경청할 줄 모르고, 자꾸 어디가 아파서 운신조차 하기 어려울 텐데현실은 늘 잔인한 것이다. 나는 저에게 덧붙여 말하기를 그러니 혼자 있는 연습이 왜 중요한가 하면 무료함과 고독의 엄습이 맹렬할 것이다. 할 게 없어 무기력에 시달릴 수도 있다. 마음은 원인데 몸은 따라주지를 않아 서러움도 극성이다. 이를 대비해야 한다. 싫든 좋든 기력은 쇠한다. 마음으로만 살 수는 없다. <혼자 있는 연습> 하나, 가만히 한 것을 응시하며 주를 음미하고 묵상하고 저가 함께 하셨던 날들을 되새기기. , 그러니 조금이라도 총명할 때 말씀을 암송하고 자주 찾아보아 그 내용을 숙지하기. , 그 정도 기력이 된다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기. 하루 한 줄, 한 장, 조금씩이라도 읽는 즐거움을 익혀두기. 젊었을 때야 떠들어대고 싸돌아다니며 지껄이는 맛에 흥겨웠지만 나이 들어 노인이 되었을 때는 곁에서 같이 그래줄 사람도 없지만 있다 해도 흥이 나지 않는 법이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저 천국을 사모하며 그 영광되고 복된 날들을 상상하며 음미할 줄 알기. 이는 절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소리가 아니다. 실제의 삶이다. 그러려면 하나님과의 시간이 즐거워야 하는데.

 

어제는 예레미야 그 인물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저는 악명 높은 므낫세의 폭정 말미에 태어났다. 히스기야가 죽고 므낫세는 55년을 통치하였다. 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악을 끌어들였다. 신상을 두고 그 앞에서 혐오스러운 제사를 드렸다. 이를 격려하려 집단으로 매춘을 하게 했고, 저들 여성이 성전에 마련된 처소에서 따로 기거할 정도였다. 각종 우상은 물론 55년간의 폭정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였다. 저들은 예배를 잃었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비화밀교가 자행되었다. 심지어 므낫세는 마술을 부리던 제단에서 자신의 아들을 산 채로 제물로 삼기도 하였다. 저의 통치 말미 10년에 예레미야가 태어났다. 그 주변환경의 피폐함과 영혼들의 황폐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왕이 된 아몬은 이태 만에 살해당했고 어린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되면서 한 줄기 빛처럼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예레미야를 부르시는 것이었으니, 그런 그가 어떻게 주의 부르심을 붙들고 굳건하게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저의 거절도 당연하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1:6).” 그때부터 하나님의 직접 교육은 시작되었다.

 

교육 목표,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 실행 방법,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8).” 그리고 실제의 훈련,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 저를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훈련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의 환상이다. 하나는 살구나무’, 그리고 하나는 끓는 솥이다. 하나님은 저에게 보이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11).”

 

살구나무는 당시 봄이 되면 가장 먼저 꽃이 피고 파란 싹이 돋아 겨울이 지나갔음을 알렸다. 저의 40년 목회 현장에서 그때마다 주춤거리고 흔들릴 때면 그 마음을 다시금 다잡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살구나무가 아니었을까?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12).” 주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약속이 매번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있을 때면 곧 다시 봄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며 가장 먼저 피어나는 살구나무였던 것처럼. 유진 피터슨의 연구를 보면 살구나무의 단어와 보다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어감이 비슷하다. ‘살구나무샤퀘드(shaqued)’이고, ‘보다는 동사의 단어는 쇼퀘드(shoqed)’이다. 즉 저는 살구나무 샤퀘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말씀을 지켜 그대로 이루시는 것을 본다는 연상을 했을 것이라는 게 유진의 설명이다(<주와 함께 달려가리라>, 유진 피터슨, IVP).

 

그리고 다른 하나의 환상은 끓는 가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13-14).” 악은 분명하고,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오늘날도 다를 게 없이 드러나고 재생산되고 끓어 넘치는 것처럼, 저는 그 악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갖게 된 것이다. 아무리 악하고 악하다 해도 그것은 다 끝이 있다. 그와 같이 악이 끓어 넘침으로 고통은 가중되고 영혼은 시달리겠으나 그러면서 또한 정화작업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가령 나는 이번에 전 세계가 코로나로 사람들의 활동이 중단되자 맑은 하늘이 살아나고 공기가 청명해져서 도시 저 끝의 뿌연 먼지에 가려졌던 것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경이로웠다. 사람이 멈추니까 자연이 살아났다는 역설 앞에 놀라웠다.

 

여하튼 나는 요즘 덕분에(?) 깊이 있는 독서가 이루어지고 혼자 있는 시간을 실질적으로 훈련하는 중이다. 이럴 땐 누굴 찾고 만나는 것도 민폐다. 심지어 잘 지내는가, 안부를 묻는 일도 민망하다. 그러나 그래서 나는 더 실제적인 혼자의 시간을 연마하는 셈이다. 오늘 지혜자의 이 말씀을 그리 읽는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11:6).” 그저 다만 주시는 날에 묵묵하여 무던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고로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7).” 이를 시인의 명료하고 단순한 기도로 아멘한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1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