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전도서 12:11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시편 113:2
말씀과 같이 하는 일은 귀하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로다 천지를 창조하셨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단지 그 말씀, 성경을 읽는 행위로는 어림없다. 그 맛을 음미해야 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이는 마치 뼈다귀를 물고 으르렁거리며 즐거워하는 사자와 같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아무에게도 굴복하지 않으려는 처사다. 이와 같은 말씀을 즐거워하며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이처럼 다시 옮겨 되새기려는,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이렇게 주신 아침 시간을 나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다. 억지로라도 일찍 자고, 아침에 일어나 말씀 앞에 앉는다. 어떤 날이든 출근하는 사람처럼 글방에 나가 오전에 읽고, 쓰고, 묵상한 글을 다시 읽으며, 이를 즐긴다. 먹잇감을 물고 어디 혼자 구석진 자리에 앉아 그르렁거리며 좋아서 뜯어대는 사자 같다. 이는 아침에서 이어 나와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 63:6-7).” 나는 나에게 허락하신 이와 같은 즐거움을 잃고 싶지 않다. 투표당일 날, 일찌감치 사전투표 날에 투표를 마친 나는 평소처럼 교회로 나가 그렇게 ‘독서’를 했다. 이는 맛보고 음미하고 코를 킁킁거리며 좋아서 침이 고이는 일이다. 이를 오늘 말씀은 한 목자가 주신 것으로 구정하였다.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전 12:11).” 즉 성령으로 감동하여 쓰인 것이다. 여러 명의 저자가 있고, 각기 다른 시대에 살았으며, 전혀 연관성이 없는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저들의 이야기는 모두 하나라. 이는 모두 성령에 의해 기록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찌르는 채찍 같고, 잘 박힌 못 같다.
누가 말하길 ‘영적독서’란 색깔이 있는 과일 사탕을 입안에 녹여서 먹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그 맛을 음미하고 입안 가득히 향이 남고 색깔이 배어 이를 숨길 수 없듯이, 말씀을 반추하여 자기 일상으로 가져와 이해 너머의 삶으로 동시에 살아가는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어다. 억지로라도 그리 읽다보면 어느새 그 맛을 안다. 나에게 묵상글은 그런 의미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시 113:2).” 하는 말씀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한다. 이는 곧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3).” 하루의 시작과 끝이고 나에게 허락하신 남은 생의 전부이기를 바란다. 곧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4).” 더 무슨 말이 필요하고 어떤 증거가 요구될까? 빼앗기기 싫은 것이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 또는 다른 사무실 사람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공간, 혼자 있는 즐거움의 최대 수혜자는 말씀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성전이고, 경배고, 찬송이며, 전도자가 그처럼 힘써 구하였던 말들이다.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전 12:10).” 즉 삶이 곧 글이고, 성경이 곧 말씀이며, 말씀은 즉 하나님이시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아내는 늦게 일어나서 나왔고 우리는 같이 느릿느릿 산책을 하였다. 오후께는 엎치락뒤치락 하는 개표방송을 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나에게는 단조로운 날들 같으나 일련의 복잡한 세상은 요동을 쳐댔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7:11).” 나는 오늘의 정세를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 뜬금없이 술자리에 있다가 친구 둘이 차례로 전화를 하였고, 누굴 찍었네, 어느 당이 어쩌네, 잠깐 열을 올리다 내가 그저 시큰둥하지, 대수롭지 않은 듯 했는지 일찍 통화를 끊었다. 아무리 어쩌니 해도 다들 참 여전하다. 괜찮다, 괜찮다 하며 안일할 따름이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9-10).” 그러면서도 믿는 사람이라 하고 그리스도인이라 하며 성도라 하는 데 주저하지 않으니까 말씀은 일갈한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3).” 그저 괜찮다지만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5).” 내 안에 두시는 두려움이 도리어 즐거움을 알게 한다. 말씀을 읽고 쓰고 일상에 젖어 살게 하심이 그 어떤 것보다 즐겁다. 이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9).”
나는 친구에게 말해주어야 하는데 저는 그럴 줄 알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듣기 싫은 말은, ‘나중에’ 하고 미룬다. 몇 년째 끊었던 담배를 도로 피우고 누구와 만나 술자리에 앉아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너는 어느 당이냐, 누구 찍었냐, 하는 말로 입씨름을 한다. 코로나19도 그렇고 이제 좀… 하고 말을 이어본들, 같이 있는 친구가 어릴 적부터 교회 친구라. 하긴 저들 사이에서는 내가 이단아다. 뜬금없이 나 혼자 무리에서 빠져나온 게 되었다. 저들은 어쩜 그렇듯 여전할까? 나는 한 구절의 말씀으로 오래 되씹으며 그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일이 귀하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엄청나지 않나? 오늘 내가 사는 날이 그처럼 전우주적인 일이다. 어쩌다 오늘이 아니다. 그 나의 날에는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데 있다. 내 부모의 생에서 하나님이 어찌 개입하시고 간섭하셨는지 그 구구하였던 세월과 형제들의 사역과 오늘에 있어 나까지… 나는 말씀을 음미하다보면 고스란히 그 말씀은 나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음을 깨닫는다. 읽기와 동시에 삶이다. 사는 게 곧 읽는 행위다. 그러니 말씀으로 산다는 일!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먼저 아셨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는 어느 것 하나도 완전한 게 없다. 당락이 좌우되고 누가 웃고 누가 우는 선거판에서조차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고작 4년의 위정생활을 위해서도 저처럼 기를 쓰고 죽을 둥 살 둥 난리를 떠는데, 하물며 영생을 두고, 어찌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오직 우리는 그분과 같이 될 뿐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이와 같은 말씀과 함께 오늘 나의 즐거움(!)을 아직 저기에 있는 친구들과 비교하는 일은 허탈할 뿐이다.
오늘 전도자의 마지막 말이 비장하게 들린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1:1-2).”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 아름다운 말씀을 음미라고 묵상하며 즐거워한다.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10).” 이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3-14).” 그러므로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시 113: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