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아가서 4:7, 16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17:2
어느 때보다 나 자신이 주인이 되는 시대다. 나의 권리는 포기할 수 없는 주권이 되었다. 그에 상응하는 나의 왕국을 건설하고 싶어 한다. 그때마다 나의 느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준다. 스스로가 의미 있는 존재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관심과 생각 그리고 현재의 마음이 중요하다. 자신의 주권을 침해하는 감정들… 지루함, 상실감, 불만족, 외로움 등을 감내할 수 없다. 얼른 휴대전화를 들고 누구 떠벌일 사람을 찾거나 여행 갈 곳을 알아본다. 뭐라도 해야 하고 새로운 기호를 찾아 나선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야곱은 혼자일 때 주를 마주했고, 모세도 가시떨기나무 앞에서 혼자였다. 다윗의 영성은 홀로 광야를 전전긍긍할 때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바울도 베드로도 감옥에 혼자 있을 때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 풍성했다. 존 번연도 감옥에 12년을 갇혀 있을 때 <천로역정>을 지었다.
요즘은 부쩍 그와 같은 시간에 대해 묵상하게 된다. 즉 나의 성향 중에 지나치게 서로와 어울리려던 것과 뭔가 초자연적인 현실을 꿈꾸던 것을 떠올린다. 욥의 세 친구 중 연장자 엘리바스처럼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욥 15:17).” 하는 식으로 자기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던 것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경험 속에 있으시면서 나를 경험 밖으로 이끄신다. 오늘 아가서의 말씀을 그런 시각에서 다시 읽어보면,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하는 표현에서 주께서 나를 그리 여겨주시는 ‘믿음을 의로 삼으시는 것’에 대해 되새기게 된다. 그 가운데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나를 주의 동산으로 이끄시면서 동시에 나를 그 동산에 두시고, 나를 그 동산으로 삼으신다(아 4:7, 16).
즉 내 안에 이는 어떤 외로움, 나의 주권을 침해하는 감정들 앞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세워진다. 그렇다고 전에처럼 친구들을 찾을 수 없는 까닭은 저들에게 토로한다고 해서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또는 어떤 기호, 즐거움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영락없이 혼자 있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게 된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사 6:8-9).” 어느 시간에 또는 마음에서 주가 물으신다.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나를 저 아이 곁에 두시는 이유겠다. 또는 누가 함께 하며 이래저래 마음이 쓰이는 이유겠다.
엄연히 나는 나 이전에 이미 나이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요즘 꽂힌 말씀인데,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6).” 나는 주저하는 까닭이 겸손인지 부담스러운 마음인지, 나이기를 원하면서도 내가 아니기를 원하고 있으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 이내 주가 하실 것임을 알게 한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8-9).” 그때마다 내 입에 할 말씀을 두신다. 그리고 말하게 하실 때에 말을 아니 할 수 없게 하신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10).” 그 왕국은 우리의 통상적인 의미와 다르다. 여러 명의 군중도 아니고 외형적인 모델의 군단도 아니다. 때론 하나, 또는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일컫는다. 이는 예레미야에게 뿐 아니라 에스겔에게도 동일하였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 2:1-4).” 오늘 나에게 두시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구체적이다. 본질은 하나님이다.
우린 누구도 완전 타락했다. 사람으로는 무엇도 새로울 수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그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신 까닭이다. 이를 먹음으로 그 기준을 자신으로 옮겨 자신의 주권이 기준이 된 것이다. 주일 날, <죄의 원인>을 말씀으로 증거 하면서 일흔일곱 생의 나의 아버지는 결연하였다. 이는 그때의 일로 그친 게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하여서 우리는 매순간 다를 바 없이 죄를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교묘하게 비틀어 질문을 희석함으로 대답을 모호하게 만들려는 시도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아는 저의 모호하였던 하나님과 같다. 마치 그의 하나님에 대해 듣다보면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 것처럼 잔잔하고 좋으나 결국은 자신의 경험이 또는 그 체험 가운데서의 감정이 우선이 된다. 그러할 때 말씀으로 기준으로 삼고 허투루 휘말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 119:32).” 주신 난제의 공식 같다.
주일 날,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고 성찬식을 하였고 함께 하지 못한 아이들을 두고 안타까워하였다. 늘 자리를 지키며 자기 몫을 다하는 아이의 충실함이 귀하였다. 이를 오늘 시편은 노래한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나에게 두신 오늘의 모든 것이 귀하다. 그것이 귀한 까닭은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1).” 다른 더 좋은 삶은 없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아멘.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아가서 4:7,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