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전봉석 2020. 4. 25. 06:56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이사야 1:9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시편 120:7

 

 

아직 끝은 아니니라.’ 하시는 말씀 앞에 굳은 결의가 필요하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13:7).” 아이엄마는 지친 목소리로 그동안의 근황을 나열하였다. 결국 한 달 남짓, 결국 쫓아내는 것이면서 저들은 법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 구실을 달았다. 그게 더 가슴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아리고 쓰려 숨이 죽었다고 하였다. ‘답이 없다.’ 어쩌면 저이의 말이 맞다. 뭐라 할 게재가 없었다. 나는 신음하듯 듣기만 하였다. 여느 날과 달리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면 뭔가 낌새가 이상한 것이다. 아이의 반복적인 카톡문자와 여러 편의 일기가 심상치 않아 아이엄마와 통화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더 좋은 자리를 예비해두셨겠죠, !’ 하는 말이 후비듯 비아냥거림으로 들렸다. 아직 끝이 아니라는 말을 차마 해줄 수 없었다. 자꾸 예전을 돌아보며 그때, 아이의 아이큐를 의심했어야 하는데그때부터 감정기복의 조짐이 있던 것인데하는 말은 덧없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1:9).” 오늘의 말씀은 어제 낮 동안에 정리하였던 설교원고의 주제를 함축한다. ‘그들, 가난한 자는 매 시대마다 남겨두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두려워할 줄 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14:5).” 지긋지긋한 현실의 고단한 삶, ‘거기서하나님은 의인의 세대에 계심을 알았다. 아무리 삶이 어떠하다 해도, ‘그러나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한다. 세상은 그들,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지만 오직 하나님은 그의피난처가 되신다(6). 나는 아이엄마에게 방금 마친 말씀 내용을 전해주고 싶었다. 늘 그렇듯 저의 한탄은 지난날을 맴돌았고, 오늘 지금이 곧 또 그리 된다는 사실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예전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문제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이다. 성경과 우리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아직 끝이 아니라는 말씀. 그러므로 우리를 기억하시고 구원하여 주시기를, 주께 아뢰어야 한다는,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74:2).” 더 나은 직장, 아이의 개선된 삶, 나아가 자신이 곧 나이 들어 죽고 난 뒤에도 홀로 살아가야 할 아이의 시간에 대하여저이의 염려에 나야말로 숨이 죽어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아는 하나님으로는 무슨 도움이 되겠나? 더 나은 직장으로 인도하시겠죠, ! 하는 저이의 말투가 속상하고 답답하였다. 이와 같은 난리와 난리를 세상을 이기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나는 주의 뿌려지심, 깨지고 터진 저의 질그릇에서 새어나온 성령의 물길로 부어지신 바 되는 다섯 가지의 내가 너희에게 이름을’을 찾아 메모해두었다가 설교원고로 작성하였다.

 

먼저는 기쁨을 주시려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5:11).” 다음은 그의 사랑으로 우리로 사랑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17).” 그것은 이 길을 가는 동안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6:1).” 그러므로 주의 말씀이 늘 기억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4).” 곧 우리 안에 평안을 더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말씀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에 대하여, 과연 언제쯤 그 입을 다물고 자신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할까? 들을 수 있을까?

 

내가 늘 그랬던 것처럼, 항상 보면 내 말이 먼저다. 내가 아이에게 좀 지치고, 누구에게 마음의 부담을 느끼고, 어떤 친구와는 가급적이면 말을 섞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도무지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듯하다. 들으려하지 않는 것은 자기 할 말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어느 당이야? 누구 찍었어? 하고 진영논리에 빠져 자신과 다르면 더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 정치논리와 같다. 보면 이게 다 자신을 두고 싸우는 일이다. 자신의 주권을 자신이 갖겠다는 자신과 이를 주가 바라시는 것이 충돌하여 냉소적인 신앙인으로 살아가거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신앙을 버리고 살아간다. 그러니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120:7).”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개입과 섭리를 말해주려하면, 거기까지! 더는 들으려하지 않고, 들어도 다만 도식화하여 더 나은 오늘이 아니면 거절한다.

 

여기서 이사야의 첫 장을 열면서 하나님의 의중을 집중할 필요가 있겠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곧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 자기 주권이야말로 우리를 더럽히는 손이다. 아무리 근사하고 우아하게 차려입었다 해도 그 더러운 손으로 얼굴을 만지고 옷매무새를 고쳐대니뭐라 한들! 그걸 그치라는 것이다. 나는 내 것이 아니다. 자식도 그 아이의 미래도 내 몫이 아니다. 남에 대한 나의 과도한 감정이입도 다를 게 아니다. 바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올바르게 도와야 한다. 신원하고 변호해야 한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16-17).” 내게 그럴 능력이 무엇이겠나? 나는 아이엄마의 긴긴 이야기에 신음하듯 대답하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저만치 벽에 걸린 십자가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님, 주님하면서 할 수 있는 말과 해주어야 하는 말에 대하여 기도로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니 내가 저보다 나아서 그러는 것이겠나? 내 코가 석 자라! 내 앞가림도 못 하며 사는 주제다. 나 역시의 처지가 부담스럽다. 그러니 답이 없다면서그 아이를 내가 어쩌면 좋을까? 당장 다음 주부터는 갈 곳이 없어서도 글방으로 와야 할 텐데, 오니 또 그걸 데리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무슨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늘 제자리 돌 듯 하는 일일 뿐인데. 그렇다고 오지 말라 할 수도 없고, 나 역시 일일이 말할 수 없어 그저 나는 저이의 늘어지는 한탄과 호소에 신음하며 주의 십자가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이어지는 성경의 원리는 간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13: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일인데,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6:12).” 일련의 상황으로 게으르지 않게, 믿음으로 오래 참게, 약속의 말씀을 받을 수 있게, 앞선 믿음의 선친들을 본받게 하신다.

 

죄가 우리 앞에 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7).” 다스리지 않으면 다스림을 당한다. 어쩔 것인가? 죄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나의 주권이다. 나에 대한 나의 권리다. 내가 알아서 한다는 자기주장이다. 그래서 내가 죽기 전에 내 자식의 앞날을 준비해야 하는데, 장사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려고 하는 어미의 심정을 알 길 없고 나이는 점점 들지만 철부지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자식의 허무맹랑함을 두고 좌절할 따름이다. , 그러니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앞에 놓인 죄를 다스리는 일일까? 한 마디로 정의하면 부활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4).” 이미 나는 죽었고 오늘의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예전의 나를 반추하여 자꾸 그때 그랬어야 한다는 식의 한탄을 버리지 않는 한 성경의 말씀은 한낱 좋은 구절, 어디 적어놓고 음미하면 좋을 말씀 정도일 뿐이다.

 

그러니 어쩐다? 오늘부터 시편의 말씀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이어진다. 그 첫 번째, 환난 중에 부르는 주님이다. 저는 응답하실 것이다. 그저 막연하게 부처님, 예수님, 천지신명을 부르는 게 아니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120:2).” 나는 이제 혐오한다. 좌절함으로 입을 다문다.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3).” 누구더러 뭐라 할 거 없다. 가장 무서운 게 세 치 혀라. 혀를 다스리지 못함으로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게 된다. 이 혀는 힘센 사람의 화살 같다. 오래도록 그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 로뎀 나무 숯불 같다. 어둡기가 물개 가죽 속 같고, 죄악 중에 머물며 심드렁한 성 같다. 그러니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6).” 그게 누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던 것을! , 우리의 한탄은 이어질 뿐이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7).”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