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이사야 5: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 124:1, 8
주의 은혜가 아니면 어쩔 것인가. 그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과연 어찌 살 것인가. 새삼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하시는 말씀 앞에 아멘 한다. 모처럼 평화로운 오후였다. 소파에 누워 책이라도 읽을까 하고 허리를 펼 때 문득 ‘생각을 주셨다.’ 그냥 입국하면 그 다음 과정은 그렇듯 간단하려니… 하고 생각하다가 ‘그래도 무슨 서류나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주신 것이다. 내가 한 게 아니라,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다. 그래서 ‘코로나19’ 대표전화로 문의를 했더니 인천시청으로, 시청에서 우리 구 보건소로 안내를 하며 각각 그 준비 과정이 여의치 않은 거였다. 단순히 입국을 하고 시설로 가 격리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러기까지 여러 과정과 진행, 진행에 따른 기다림이 필요하였다. 문제는 ‘너무 많은 입국자들’ 때문에 모두들 집으로 데려다 주고 자가 격리를 하게 한다는데….
여의치 않은 우리 형편과 집에서 공부방을 하는 아내의 일에도 문제가 있었다. 더욱이 우리 아파트는 노인 분들이 많이 사는 복도식 구조라서, 그러니 시설에 들어가길 신청했으나 운영하는 시설이 늘 꽉꽉 차는 형편이라. 그때 또 놀라운 하나님의 간섭이 이루어졌다. 보건소 직원이 그 최전방에서 바쁜 와중에도 자기 일처럼 돌보아주는 것이다. 상사에게 묻고 다른 경로로 여기저기 알아본 뒤 시설에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고, 그 검체와 검사 과정에서 소요되는 기다림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자신이 한 시간 일찍 출근하여 직접 검체를 채취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럼 바로 업무시작과 동시에 전날의 검체를 보낼 때 같이 검사를 보내면 오후 3시쯤에는 결과가 나올 것이고, 음성이 나오면 오늘 저녁 6시쯤에 입실이 가능하도록 말이다. 전화 저편에서는 여러 명의 직원들이 이런저런 통화 내용과 업무 파악으로 왁자하게 소란스러웠다. 저들은 코로나 최전방에서 그처럼 사투를 벌이며 분초를 다투고 있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이처럼 평안한 생활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서류를 먼저 꾸미고 역학조사를 전화로 내가 대신 진행을 했을 때, 통화 가능한 전화가 필요한데 당장 아들 본인이 개통을 할 수 없으니 이 또한 낭패가 되었다. 급한 대로 내 이름으로라도 하나를 더 개통해서 당장 보내야 하나, 하고 매장에 들러 상황 설명을 하였더니 안면이 있는 점장이 또한 자기 일처럼 나서서 매장에서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것을 빌려주겠다는 것이다. 것도 최소 14일간 그걸 그럼 사용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는 그 폰을 보건소 담당 직원에게 보내야 하는데 것도 자신들이 이용하는 퀵서비스를 이용하여 무료로 그리 편의를 봐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저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던 일에서 이처럼 하나님은 생각을 주시고, 모든 일에 예비한 손길들을 동원하여 이와 같은 은택을 입히셨다. 아니었으면 아들이 그냥 집으로 와서 서로가 낭패를 보거나 검체 채취 후 10시간 이상 또는 하룻밤을 체육관에 마련된 책상에서 밤을 보냈어야 하는 일일 텐데….
일련의 상황을 이처럼 소상하게 나열한 까닭은 하나님의 세밀하신 손길이 나의 아둔함을 앞서신다는 것이다. 안이하고 막연하여 처하게 될 낭패와 고생을 미연에 알려주시고, 이를 해결하는 데 있어 앞서 세우신 이들의 도움을 받게 하셨다. 이를 오늘 말씀 첫 구절에서 읽는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 5:1).” 그렇듯 예비하시고 보살피심으로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도대체 우린 어쩌자는 것일까? 어떻게 “들포도를 맺었도다(2).” 자 이제, 주의 배성은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3).” 주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이 모두 허사인가?
오늘 본문은 각각의 문제에 따른 경고를 하신다. 먼저는 욕심에 대한 경고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8).” 충분한데도 충분한 줄 모르며 자기 것에 더 분분한 삶에 대한 말씀이다. 두 번째로는 자기 즐거움으로 자기만족을 얻으려는 데 따른 경고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자기만족을 위한 생활에 대한 경고다. “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12).” 다음은 세 번째로 암중모색에 따른 거짓을 경고하신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단순하게 어떤 상황을 모면하려는 그 이상의 악의적인 거짓이다. 거짓에 거짓을 더해 수레를 끌 정도의 죄악으로 일삼는 자기방식에 대한 말씀이다.
네 번째로는 그러다 보니 휘둘리고 휘말려 어느새 저들보다 악의적이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왜 그러는 것일까? 이어서 다섯 번째는 자신을 믿는 것에 대한 경고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이어서 스스로 자축하며 즐기는 여섯 번째의 경고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암암리에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지 않던가? 나는 궁지에 몰린 누구를 위해 그처럼 내 일 같이 나서서 주의 사랑으로 대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에 분토 같이 되었도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25).”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평안한 잠을 주시는 것 같이 사랑하시므로 그들을 치시기도 하신다. 이어지는 경고의 말씀을 이제 나는 두려워할 줄 안다. 설마, 하고 안이하게 받지 못한다. 하나님의 손길이 때를 따라 시의 적절하심을 이제는 안다. 내가 안이할 때 나를 일으켜 세우신다. 우왕좌왕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을 때도 주께서 모든 여정마다 사람을 붙이시고 저들의 돕는 손길로 일을 풀어 가신다. “또 그가 기치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자기에게로 오게 하실 것이라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올 것이로되 그 중에 곤핍하여 넘어지는 자도 없을 것이며 조는 자나 자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들메끈은 끊어지지 아니하며(26-27).” 그러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참으로 신묘막측 할 따름이다. 너무도 묘하고 신기하여 내가 어찌 추측을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렇게 말씀 묵상을 글로 쓰고 있는 중에도 아들애가 무사히 귀국하였고, 일정에 따라 보건소 선별진료소로 가고 있다는 문자를 받았다. 다른 건 자치하고, 아이가 무사히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하게 된다.) 주의 은혜란 우리가 미처 그리 알고 감사하는 수준 그 이상의 것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엄청난 섭리와 예정하신 바 그 계획에 따른 손길이 있음을 믿는다.
소망은 믿음의 확신이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행 3:26).” 더는 걱정하지 말고 염려할 것이 없는데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소망을 두는 일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내 앞서 먼저 보내신 이들의 손길로 우리는 악에서부터 벗어난다. 이에 나의 할 일은 오직 하나,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다른 데 기웃거릴 거 없다. 누구 도움의 손길을 찾을 것도 없다. 예수만 바라보자. 주께서 모든 값을 이미 지불하셨다. 내 의지로 이겨낼 수 없는 나의 두려움과 병적인 불안에 대해서도,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7-18).”
부디 나의 남은 생이 말씀으로 나를 이끄시기를. 강권하심으로 말씀으로만 나를 세우시기를. 그러므로 나는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시 124:1).” 오늘 말씀을 내 것으로 되새긴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