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전봉석 2020. 4. 30. 05:40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이사야 6:13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편 125:1

 

 

모든 것이 때를 따라 주의 손길로 돌보심을 받았다. 알면서도 이를 온전하게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인지 불안은 가중되었고 여러 생각이 마음을 좌지우지하였다. 너무도 순조롭게 극적이면서 맞춤하니 하나님의 도우심은 짜임새가 있었다. 아들은 여섯 시에 귀국하여 간단한 절차를 거쳐 코로나 택시를 타고 남동 보건소로 직행했다. 전날 그리 마음을 써준 공무원에 의해 업무 시작 한 시간 전에 검체 채취가 이루어졌고 오후 세 시를 조금 넘기면서 음성판정이 나왔다. 당일에 그처럼 격리 입실까지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고 하는데,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관여가 아니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처럼 모든 게 다 주의 도우심 안에 있는데도 나는 마음이 어수선하였고 행여 순서를 놓칠까, 혹시 양성이 나오지는 않을까, 입실하는 문제가 뻐그러질까, 노심초사하였는지 급기야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어려워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런 나로 사는 게 참 고단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말씀 앞에서 나는 면구스럽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누구를 말씀으로 위하고 아이를 신앙으로 건사해야 하는 일이 나에게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일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누구를 대신해주는 천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담당의의 말에 마음이 찔렸다. 자신도 수도 없이 그러한 자책에 빠진다며 그럴 때면 환자를 상담하고 마주하는 일이 아주 고역이라고 토로하였다. 나아가 자신의 학창시절 때의 일까지 들려주는 바람에 저와의 대화가 너무 길어졌다. 결국 처방은 똑같았고, 조금 더 세게 출렁거리면 조금 더 세게 약을 복용하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은 듯 일러주었다. 답답한 노릇이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의 회상은 나를 주춤하게 한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6:8).”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어쩌면 아직까지도 마지못해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제쯤 내 안에서 자발적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할 수 있을까? 주께 맡기고 마음을 담대히 먹어야 하는데, 그리 또한 누구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기도 하면서도나야말로 이 모양이니 송구하기 이를 데 없다. 아무도 모른다 해도 나는 주 앞에서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다. 어쩜 이렇듯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자를 택하셔서 오히려 짐이 되게 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은혜를 알면 알수록 내가 더욱 주께 헌신해야 할 텐데순종은커녕 복종도 묘연하기만 하여 자꾸 회피하고 도망치려고만 하는 것 같아 면목이 없다. 누구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는 갈등이라, 나를 조금 아는 의사는 그런 게 다 스트레스의 요인이 된다면서 갈등 구조를 피하는 게 낫다고 하는데그야말로 득도를 한다고 해서 내가 과연 좀 나아지겠나?

 

오후께 아이가 마지막으로 퇴근하면서 전화를 했다. 위로를 하고 힘내라고 하는데 아이가 불쑥 더 좋다.’고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이제 매일 글방에 갈 수 있고 목사님한테 갈 수 있어서 좋다는 소리였는데 그것이 또 가슴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 와봐야 뭐하겠나? 뭔 소릴 한들 달라질 게 없는데그저 서로가 지치는 일이라, 그러니 오지 말라 할 수도 없고 오라고 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에 있어 그때마다 불안은 가중되는 것이었으니. 솔직히 난 나 때문에 저 아이가 어떻게 될까봐 두렵다. 전에 토요일에 오는 친구를 야단치고 한동안 연락이 안 됐을 때 나는 그 친구가 극단적인 짓을 했을까봐, 겁먹었다! 그러한 파장이 여전한 것이라고 담당의는 말해주었다. 그러니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모르는 척 도망칠 수도 없고.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하는 고백은 언감생심, 나는 아이라!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1:6-7).” 하시는 말씀 앞에 속수무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한 가지, 서로 사랑하라는 것.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순종인 것을 알지만,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5:10).”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23:26).” 그런 점에서 나의 불안은 다른 측면에서는 죄의식이다. 나는 누구를 회피하고 있다. 저는 토요일에 다시 오고 싶어 하는데 나는 저를 다시 볼 자신이 없다. 아이는 다음 주부터는 글방으로 와야 할 판인데 싫든 좋든 이를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고 보면도대체 이런 자가 무슨 낯짝으로 목사 행세를 하며 살고 있는 것인지! 가중되는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고 주의 도우심만을 의지하며 살면 되는 것일 텐데, 그게 이처럼 어려운 까닭은 나의 죄악된 본성과 아집이 아니겠나? 좀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조금은 온전한(?) 상대를 대하고 싶다. 적당히 대화도 통화고, 뭐를 이르면 조금씩 나아지는 기미도 보이고 보람도 느끼면서 어떤 성과도 거두고그런데 이건 하나같이 다 제자리걸음이라. 했던 말 또 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어르고 달래가며 주의를 준다 해도 또 다시 하나마나한 것만 같으니까.

 

그래서 은근히 교회 목사보다 글방 선생 적이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땐 그래도 꽤 괜찮은 애들(?)이 많았다. 성적 좋아 가르치는 족족 제법 올랐고, 나름 좋은 대학들도 갔고, 그때마다 논술이나 글쓰기로 성과를 거두면 그 부모들도 나를 우러르며 깍듯이 선생으로 대우하기도 하였는데 며칠 전에는 그래서 교회등록지를 집으로 옮기고 여길 글방으로 등록하여 예전처럼 원생들을 받고 정식으로 정상적인(?) 글짓기를 가르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신기한 게 공짜로는 다들 시큰둥한 것이다. 세상이 이상한지, 하나님이 이상하신지, 무료라는 것과 교회라는 것에는 왜들 알레르기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제 와서 새삼 그렇듯 궁리하는 일도 우습고, 나름은 하나님께 집중하고자 돈벌이에 연연하는 글쓰기나 다른 일은 하 않으려고 한다면서도이거야 원! 앞뒤가 맞지 않는 이중적인 나의 마음이 나의 부담이기도 하다. 대체 나의 이 복잡한 심경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10:7).” 족한 줄 알아야 하는데.

 

나의 순종은 이처럼 묘연하기만 한 것일까?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10:12-13).” 말씀 앞에 가만히 앉아 주를 바란다. 그런데 나의 바람은 주의 말씀이 아니라 내 안의 안이함이 아닌가. 내 소원이지 않나. 내가 주인이 되어 나를 자유롭게 내버려두기를 바라는 마음.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기만 한, 한사코 외면하고 싶은 이들로부터의 회피. 그런 내게 말씀이 쫓아오신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11:13-15).” 말씀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라.

 

일찍 잠들었다가 너무 일찍 잠에서 깼다. 새벽 네 시에 말씀 앞에 앉아 나는 마치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입을 댓 발 빼물고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린다. 언제쯤 주의 뜻에 온전하여 한여름 그 주인에게 얼음냉수 같은 주의 종이 될 수 있을까?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25:13).” 나는 그저 어디가 막힌 하수구처럼 도무지 물이 잘 빠지질 않는다. 맑은 물을 틀어 깨끗이 씻고 분주하게 수선을 떤다 해도 씻어낸 물이 잘 내려가질 않으니 오히려 찝찝할 따름이다. ,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13:3).” 허튼 데 마음 쓰지 말고 주만 바라면 될 것인데믿음으로 담대히 맡기고 의지하여 툴툴 털어내고 이겨내면 될 일인데만일 누가 내게 의뢰하였다면 그리 말해주고 위로하였을 일을 나는 이처럼 쩔쩔매면서 속수무책으로 주 앞에 섰다.

 

내 안의 그루터기로 남은 거룩한 씨로 산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6:13).” 다 황폐하여 더는 쓸모없는 것 같아도 거룩한 씨의 그루터기를 남기셨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125:1).” 하는 오늘의 말씀 앞에서 나는 염치없게도 주를 바란다. 늘 똑같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내게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신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그리하여도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2).” 하여서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