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이사야 10:15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시편 129:4
내가 임의로 행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이제는 자유하다. 마음대로 행하였던 지난날의 여러 행사에서 놓여난 것이 감사하다. 더는 내가 나를 자랑하지 못하는 일에 있어서도 다행하다. 그런 맥락하에서 오늘 말씀을 새로 읽어본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사 10:15).”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닌 것으로서 이 몸도 마음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기쁨이 되었다. 그럼으로 얻은 것은 서로가 다른 것과 그 다양성에 대해 새롭게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이처럼 나의 불안증의 요소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앞서서 염려하는 병(예기불안)’ 때문이다.
이것까지도 내가 어찌 다스리고 이겨내려고 하다보니 지쳤다. 나는 한 걸음씩만 걷는다. 오늘을 더하셨음으로 오늘을 산다. 저 아이, 이 일, 지금 이 상황, 나의 불안정한 건강, 지긋지긋한 불안까지…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몸의 지체가 여럿이고 교회의 직분이 다양한 것처럼 오늘의 여러 다양한 사연들도 주가 주도하심에 있다. 그러는 가운데 기본 전제를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 읽는 듯하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시 129:4).” 돌아보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주께서 나에게서 악을 끊으셨다. 함께 추구하고 다투어 갈망하던 즐거움에서 놓여나게 하셨다. 하나님 없이 즐기던 온갖 쾌락과 갈망에서 놓여날 수 있게 하셨다. 이는 때가 되어 주께서 임의로 끊으신 것으로써 내 의지나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도끼든 톱이든 막대기든 몽둥이든 주께서 쓰시는 데 따른 유용할 따름이다. 저들이 스스로 그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는 일은 없다. 그리하여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그야말로 주께서 다 계획하시는 일이라. 사실 나는 어제 아침까지도 아이를 어떻게 할까? 생각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 싫은 마음과 그럴 수 없는 여건이 맞물며 지금의 내 상태로는 어려운 것 같았다. 더욱이 딸애도 5월 한 달은 매일 교회로 나와 시간을 보낼 것이고, 곧 아들도 돌아오면 그리할 테고, 고2 아이도 이제 오게 될 텐데… 아무런 성과는커녕 하나마나한 것보다 좌절하게 하는 것은 없는 일이니, 아이를 못 맡겠다고 해야 하나… 일주일에 한두 번만 오게 해야 하나… 안 한다고 해야 하나… 생각만 자꾸 늘어지고 있었다.
그때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롬 12:7-8).”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도끼는 톱이 아니고 톱은 망치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고 망치는 몽둥이가 아니며 몽둥이는 지팡이로 쓸 수 없다. 각자의 역할과 쓰임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내가 아이를 오후까지 건사할 수는 없는 일이고, 오전에만 오게 하였다. 오전 일찍 오고 함께 점심을 먹고 돌아가는 것으로, 그리 아이에게도 일렀다. 오후 시간을 어찌 보내게 할까 하는 일에까지 내가 관여하고 나서서 챙길 수는 없다. 갈 데 없으니 맡기는 일이겠으나, 누구 말처럼 ‘그 병’은 난제라. 20%도 연구가 안 돼 앞으로 사회적으로 암보다 더 위협적인 문제가 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서로의 역할에 따를 뿐이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5).” 그렇다고 서로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가령 눈이 안 보여 손이 도울 수는 있으나 손은 손일뿐이다. 다리가 불편하여 팔이 돕는다 해도 팔은 팔일뿐이고, 그러는 가운데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26).” 같이 나눌 수 있으나 대신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까지는 아니다. 나는 지체이지 내가 몸이 아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27).” 아이를 내가 주도할 수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의사는 말했다. ‘선생은 천사가 아니고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지나친 감정을 이입하면 스스로에게뿐 아니라 상대에게도 결코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저의 말에 동의하였다.
가령 어느 날 내가 아이를 야단 좀 친다고 할 때 그것이 전에부터 켜켜이 싸여온 나의 감정이 증폭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 안에 잠재돼 있던 불편과 불안이 아이의 한 문제에 전가되어 굳이 안 해도 될 말과 함께 더 ‘얹는 감정’이 문제라는 것이다. 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내가 누구에게 실망을 했다고 할 때 실은 그 무게가 저의 잘못만이 아니라 내 안에 누적된 피로감이나 다른 이물감, 여러 감정들이 포개져 더해지는 무게라는 것이다. 실제로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랑이란 그저 ‘너를 위하여’ 희생에 희생만을 얹으면 되는 줄 알았다. 희생이란 내가 참고 그저 묵묵하게 이겨내면 되는 일인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파생되어 나타나는 감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교묘함과 악랄함과 굳이 필요 없는 관여까지 더해져서,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고 헌신을 우상처럼 떠받들게 하고 있던 것이다.
주일 아침, 예배에 앞서서도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그러니 그냥 하는 데까지 하자는 식으로 주먹구구식으로 떠안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코 그래서는 안 될 문제였다. 아이 또한 아이 스스로 자신의 장애든 ‘어쩔 수 없는 감정의 문제’까지도 자신의 몫인 것을 감당해야 하는 문제였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여기서 십자가는 감당하게 하시는 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것으로 하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것을 놓칠 때가 많다. 내가 부모니까, 목사니까, 그래서 친구니까, 선생으로서… 하는 당위는 우리를 과도한 피로 가운데로 내몬다.
그럴 때 나타나는 것이 위선이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못 하는 건 못 하는 거다. 무조건 잘하려고 하는 일 자체가 위선을 조장한다. 괜찮아, 잘 될 거야! 하는 마음은 희한하게도 남의 인정을 받도록 이끌고, 저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졸지에 수치심으로 돌변한다. 그래서 성경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곧 내가 할 수 있는 정도가 나의 은사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이를 일찍 오게 하고 같이 말씀을 읽고, 영어를 외우고, 혼자 할 수 있는 무엇을 훈련하게 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나는 저의 보모가 될 수 없고 과도한 응석받이를 떠맡는 돌보미가 될 수 없다. 아이에게도 옳지 않다. 그 엄마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도 아이의 장애를 장애로 인정하기보다 정상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아이를 자꾸 사지로 내몬다. ‘일반적인 일’을 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라지만 그것 자체로 이미 아이의 병을 키우는 것이라, 그리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는 일이어서… 아이엄마와의 대화는 지극히 사무적일 따름이고 더는 진척이 없다. 저이 스스로 환자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다 때가 있고, 정하신 이들이 있을 터,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사 10:20-21).”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시 129:4).” 주의 도우심과 그의 주도하심으로 나는 이제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이 모든 고충은 다 지나가는 것이다.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6).” 오직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54: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