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전봉석 2020. 5. 6. 06:35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이사야 12:2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31:1

 

 

10년 전 교육부 장관이 누구였는지 기억하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함께 어울리며 즐거워하였던 사람이나 그 놀이를 여전히 같이 하고 사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훌륭하고 부러운 사람은 많으나 인격적이고 성숙한 사람은 드물다. 같이 하면 즐거우나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인물이 되는 일은 어렵다. 5년 전 베스트셀러 작가가 누군지, 유행하던 옷차림이나 문화에 대해 여전히 같은 관심 속에서 사는 사람은 또한 몇이나 될까? 즐겁고 유쾌한 시간은 더러 있을 수 있었지만 그것으로 같은 만족을 누리며 사는 것은 몇이나 될까? ‘온전한 인간다움이란 인격적인 성숙에서 찾아지며 그것을 간직하고 유지하는 일에서는 계속적인 성장밖에는 없다.

 

오후께 들어온 문자 하나로 나의 하루는 흔들렸다. ‘새삼누가 안부를 물었고 나는 그에 답하는 것도 주저하였다. 여기서 새삼공연히 지난 일또는 하지 않던 일따위를 이제와 다시금 새롭게하는 따위의 느낌이나 감정을 일컫는 의미다. 얼추 10여 년 전 딸아이처럼 여기던 누구의 나이 많은 남자 친구로 두어 번 예배에도 나오고 이야기를 조금 섞었을까? 그 뒤로 안 좋게서로가 끝나면서 나까지 별다른 감정 없이 지내오던 터라, 저가 나의 안부를 묻고 새삼 찾아뵙고 싶다는 말을 할 때는 어떤 답을 해야 할지, 심지어는 별로 반갑지 않은 감정까지 들어서 어찌 거절을 할까도 생각하였다. 마침 아내와 딸애도 같이 있었고, 그렇듯 주저하는 내게 온다는 걸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주저하였던 것이다. 딸처럼 여기며 지냈다 해도 그 애조차 연락이 끊긴지도 몇 년 된 터라.

 

목사로 주어진 사명 가운데 싫든 좋든 감당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사람을 대하는 일이다. 탐탁지 않다 해도 마주해야 하고 또는 거절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어떻게 거절을 할까, 할 말을 고심하고 있던 나는 찾아뵙고 드릴 말씀이 있다는 저의 간곡한(?) 문자에 더는 뭐라 마다할 수가 없어 다음 주 월요일로 멀찍이 약속 시간을 잡았다. 이쯤 되면 단지 스치듯 만났던 사람에 대한 예의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그리 정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하는 말씀에서처럼 우리는 엄연히 숨길 수 없는, ‘불 켜진 산 위의 마을같은 존재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5:14-15).”

 

이는 우리 믿는 자들의 숙명이다. 감당해야 하는 사명인 것이다. 달갑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저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딸 같은 아이에 대한 기억도 이제는 희미한, ‘새삼스러운 만남에 대해 나는 꺼려지고 주저하게 되는 마음이었으나 연거푸 들어오는 문자와 찾아뵙고라는 저의 전제된 이유를 가늠할 수 없어 주를 의뢰한 것이다. 온전한 인격자란 유아독존, 혼자서 충분한 사람은 없다. 사람으로 부대끼고 그 일에 연연해하며 쓸리고 깎여서 조약돌처럼 맨들거리며 거칠지 않은 인격자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이다. 이는 곧 나를 비우는 일로 텅 빈 나가 아니라, 비로소 예수로 채우는 일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7-8).”

 

오늘 말씀을 그렇게 다시 읽는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12:2).”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 오늘 말씀 앞에 보라하는 부사를 붙여 청유형으로 어떤 수준이나 이전의 상태에 비해 한층 더하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즉 막연하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는 감동과 동감의 의미가 내포된 감탄의 의미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1).” 곧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을 전하는 일에 있어, 전과 후가 분명히 있는 경계의 그 날에새삼의 앞과 뒤가 있는 의미를 띈다. 전에는 이러했던 게 후에는 이러하게 되는, 앞서는 저러했는데 뒤에는 저러하게 되는. ‘분명한 무엇보라!’ 즉 감탄형 의미의 부사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이란 참 기묘한 것 같아서 그냥은 그러지 않는다.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재난은 그래서 사람을 온전하게 한다.’ 어떤 일, 무슨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예전에 잃었던 사람을 찾아보게 되고 또는 걸어왔던 길을 돌아서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기묘하다는 표현까지 쓴 까닭은 사람이 본래 어지간해서는 되돌아보거나 멈추어 생각을 다시 가다듬지 않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그래서 나는 한 술 더 떠 재난은 은혜로 가까이 밀어주는 파도와 같다고 여긴다. 어려움이 없이 기도의 필요성을 유지하는 경우는 드물다. 먼발치께 있는 10년 전 교육부 장관을 기억하지 못하고, 5년 전에 즐겨하던 것을 잊고 사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일도 없겠으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불러 세우실 때,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가 된다.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자세가 올곧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131:1).” 그럴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의 품에서만 평안을 누리는 일이다. 이는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여기서 젖 뗀 아이는 자기 의지로 그러하다는 것이다. 아무런 의지도 없는 갓난아이가 아니다. 젖을 뗄 정도이면 어느덧 인지능력을 갖추었다. 엄마의 품을 안다. 시인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막연하게 안긴 아기 그 이상의 존재감이다. 그래서 실로라는 부사를 얹은 까닭은 사실 그대로 아주확실한 느낌이나 표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로내가 내 영혼으로엄연한 자유의지를 갖고,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즉 그 수고에 따른 노력의 하나로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이보다 더 친밀하고 확실하고 느낌이 선명한 게 또 있을까?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이끌리어 사는 삶이 신앙이 아니다. 또 주일이 오고, 성경을 읽고, 누구와 인생을 논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듯이 그렇고 그런 막연한 처사가 아닌, 비록 여전히 미숙하고 어리지만 그 날의나는 전의 나와 다른 후의 나를 대변하는 의미로서의 존재이다. 이는 곧 성장의 분명한 증거이다. ‘그 날에우리는 엄연히 말해야 한다. 오늘 이사야도 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1).” 이를 알기 때문에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2).” 하는 감격의 고백이 내 것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구원의 기쁨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3).” 물로 세례를 받아 주의 구원에 들어간 사람답게 우리에게는 구원의 물을 길어야 하는 책무가 있다.

 

바로 “‘그 날에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4).” 이는 곧 오늘이라 일컫는 날에 생경하면서도 새삼스러운 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로써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5).” 나는 저의 문자와 찾아뵙고 드릴 말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일이 있다. 그저 간보듯 전에 헤어진 그 애에 대한 궁금증 때문인가 하여 나 또한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디 새삼스러운 우리의 만남이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저의 영혼을 돌이키는 물꼬가 될 수 있기를. 객쩍은 소리지만, 저에 대해 첫인상은 여호와 이레를 뜻하는 저의 이름 때문에 호감이었다.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6).” 우리에게 두신 사명이라. 숙명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131:1).” 하는 오늘 시인의 고백이 내 것이 될 때에 내 딛을 수 있는 첫 발이다. 그러할 때 나의 영혼은 평안하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그리하여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