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을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

전봉석 2020. 5. 7. 06:58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 너희는 민둥산 위에 기치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그들을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

이사야 13:1-2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시편 132:8

 

 

바벨론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주목한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대한 경고의 말씀과 같다. 훤히 다 보이는 민둥산 위에 깃발을 꽂으셨다. 구별된 존귀한 자들은 그것을 보고 들어갈 것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약속은 놀랍다. 어떠하든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듣는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43:1).” 아무리 바벨론에 끌려와 사는 꼴이라 해도 그런 가운데서도 주께서는 지명하여 부르신다.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2-3).”

 

그런 가운데도 나름의 궁리를 다해, 바벨론에서 벗어나려 애굽과 동맹하려던 이스라엘의 몰골을 볼 수 있다. 주전 598~587의 일로 바벨론의 점령을 당한지 11년째 되던 해이다. 결국 동맹은 깨졌고 그로 인해 바벨론의 가혹한 보복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예레미야는 실제 주의 말씀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저 표징이나 상징으로 주의 구원의 날을 예비한 게 아니다. 저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 고향 땅 예루살렘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아나돗의 땅을 실제 값을 주고 샀다. 더욱이 지금 그 땅은 바벨론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저들의 진영이었다. 그런 가운데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31:8).” 하시는 말씀에 주목하였다.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7).”

 

누구든 듣고 믿고 이를 붙들어 구원으로 들어간다. 누구는 은유나 상징으로 듣고 어떤 신비적인 행위로 포장한다. 또는 외면하고 아예 거절한다. 나는 모 교회의 이상한 신앙 훈련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놀랐다. 거두절미하고 인분을 먹이면서 무슨 훈련을 강행하였다니어디서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예방하며 안수 기도와 함께 그 입에 소금물을 뿌렸다고도 하고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9:8-9).” 암울하고 답답한 소식이다. 오죽하니 애굽과의 동맹을 모색하고, 나름의 신비적인 행위들을 동원하여 살 궁리를 하는 것이겠나만. 그러한 때에도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32:8-10).” 저의 말씀에 대한 삶은 실제다.

 

더는 쓸모없고 가망이 없을 것 같은 땅을 정식으로 샀다. 그리고 그 증서를 그의 친구 바룩에게 맡긴다. 그리고 기도한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내가 매매 증서를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넘겨 준 뒤에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15-16).” 주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은으로 밭을 사며 증인을 세우라 하셨으나 이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신 바 되었나이다(25).” 그런 가운데도 저는 말씀을 따랐다. “보라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27).” 이와 같이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그 이야기가 결국은 내게 향하심을 느낀다.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이런저런 저마다의 어려움으로부터 속박을 당하고 포로 된 자로 살아가면서, 그러니 어쩔 것인가? 예레미야는 그 와중에도 실제의 삶을 순종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저의 안에 소망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망은 말씀을 근거로 한다.

 

저가 지금 자신의 처지에 그것도 쓸모없이 적군의 주둔지로 더는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아나돗의 땅을 샀다는 것은 소망에 근거를 두는 의도적인 행위였다. 백성들에게 직접 보게 하는 실제의 삶, 민둥산 위에 꽂은 깃발 같은 삶이 곧 우리의 생활이었다. 성경은 소망을 갖게 하고 우리 안의 소망은 성경으로 삶을 살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한결같이 인내하며 기대하고 무던하게 또한 묵묵히 사는 것이다. 소망은 우리로 믿음을 가지고 사랑을 사들이는 일이다. 소망의 진가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다. 다들 그렇다 하고, 저마다 교회들이 또는 저명한 목사들이 지향하는 것들을 따라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넌더리나는 사람을 마주하는 일이다. 실제의 삶이다. 어느 아이를 더는 구제불능이라고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다. 주가 붙이시면 그리하여 저로 하여금 글방으로 오게 하시면 물러서지 않고 감당하는 것이다.

 

오후에 아이가 전화를 했다. 글방에 와도 되는가, 해서 주저하다 금요일에 오기로 했다. 물론 나는 늘 주저하고 엉거주춤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마다하지 못한다. 그러할 때 저와 같은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일이었으니, 말씀 앞에서는 실제뿐이다. 순종하든가, 불순종하든가. 그리 행하든가, 마다하든가. 나의 이 소소하고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현장에서도 말씀은 능력을 행사하신다. 하기 싫고, 외면하고 싶고, 모르는 척, 나만 고상하게 살면 그만일 것 같은 마음을 말씀은 후벼내어 소망을 일깨우신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아이인데또는 누구를 대하는 일이란 게 진이 빠지고 넌더리나는 일일 뿐인데하나님은 생각이 다르신 것이다. 소망을 품고 사는 게 절망에 빠지는 일보다 어렵다. 절망하면 오히려 만사가 넉넉하다. 어떤 위험도 감수할 필요가 없다. 냉소주의로 사는 게 그래서 더 낫다. 그러나 말씀은 이런 나를 흔들어 놓으시는 것이다. 딱 그맘때, 아이의 전화를 받고 주저하다 마지못해 하루 이틀 더 미루어오게 하면서 미적거리는 마음일 때, 성경은 날카롭게 나의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을 파고 드는 것이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43:4-7).”

 

그를 하나님이 지으셨고 그를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런 자를 오늘 내게 보내시며,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시는 일이었다. 그러니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8:2).” 내가 어찌 못 들은 척 외면하고 거절하여 그릇된 길로 갈까. 오늘 말씀은 그리 훤하게 보인다. “너희는 민둥산 위에 기치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그들을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13:1-2).” 앞으로 있을 이 땅의 여러 재앙은 그것이 끝이 아니다. 비로소 시작이다. 심판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드디어 새로운 것이다. 그러할 때,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132:8).” 하는 말씀을 이어서 읽고 묵상하며 주의 소망을 구한다. 맡기시는 일이면 또한 주의 권능도 더하실 것이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110:3).”

 

말씀으로밖에는 답이 없다. 내가 나를 감당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132:4-5).”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