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전봉석 2020. 5. 13. 06:13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이사야 19:1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편 139:7-8

 

 

영적으로도 우리는 여전히 애굽을 찾는다. 믿음의 길은 불확실하다. 어찌 설명하고 증명할 길이 없다. 애굽은 확실한 것을 선호하고 여러 추론과 반추와 통계와 자료를 가지고 확실성에 의존한다. 훨씬 설득력이 있고 구체적이며 정확한 것 같다. 가령 코로나19’ 전염병을 잘 통제하고 방역에 성공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K방역 체계가 어이없게도 젊은이들의 클럽으로 인하여 다시 확산하는 추세가 되었다. 그러자 다시 사례를 모으고 자료를 작성하고 어떤 확실성에 의존한다. 애굽의 특징이다. 그러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19:1).” 곧 애굽의 특징은 우상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4대 우상론이 생각난다. 첫째는 극장의 우상이다. 이는 스스로의 고뇌 없이 남의 손을 빌리려는 데 따른 것이다. 가령 드라마나 영화, 소설이 성행하는 이유다. 대리만족을 느끼며 각종 연예인들을 우상화한다. 남의 이야기에 치중하는 삶이다. 둘째, 종족의 우상이다. 소위 말해 끼리끼리의 문화로 모든 사고논리가 이분법적인 태도이다. 특히 오늘 같이 팬데믹(pandemic)으로 세계적인 전염병 대유행이 창궐한 때에는 민족주의가 극성을 부린다. 자국민의 보호가 우선이다. 지역주의가 판을 친다. 그것으로 결속을 다지려는 것이다. 셋째, 시장의 우상이다. 거기에는 자기들만의 언어 세계를 가졌다. 어순과 체계와 사고의 틀이 언어로 이루어져서 사용되는 언어에 따라 갈린다. 나는 이제 젊은이들의 언어와 랩, 줄임말 따위에서 소외되었다. 넷째, 동굴의 우상이다. 주관적인 견해로 사고하고 판단한다. 동굴 밖의 세계에서 온 사람은 이단아가 된다. 자기 울타리 안에 갇힌 사회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일은 그와 같은 우상의 세계에서는 구경거리가 되는 꼴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 오히려 우리 믿음의 불확실성에 대한 호소를 저들은 비웃는다. 자신들의 확실성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게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쓸모가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10-13).” 애굽에서는 우리의 세계가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일이다. 때가 어느 때인데 믿음으로 산단 말인가!

 

우리는 온통 우상의 나라에 살고 있다. 베이컨의 4대 우상론 외에도 얼마나 더 많은 우상들이 난무한가 말이다. 2 아이와 대화하면서 나는 정말이지 울어버리고 싶었다. 그렇듯 옳다고 여기는 자신의 주장과 생각으로 살면서 고작 그 삶을 놓아두는 데가 게으름의 온상이었으니, 스스로도 그러는 자신이 싫은데 싫은 자신을 고쳐야 한다는 것은 더 싫다. 누가 뭐라 그러는 게 싫고, 스스로 무엇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더 싫다. 그러니 나는 안타까워서 사지육신 멀쩡하고, 정신 온전하고, 어쨌든 부모가 살아 있고 가정이 있으니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왜 그러고 사는가! 초딩부터 요즘 아이들은 코로나로 인한 전염병의 시대가 너무 좋다. 클럽으로 인해 다시 유행하는 전염병으로 학교 등교가 한 주간 더 연기되자 아이들은 좋아서 죽겠단다. 늦게 늦게까지 늘어져 자고 하루 종일 간섭하는 사람 없이 TV 보고, 게임하고, 핸드폰을 할 수 있어서 좋다는 데야, 아무리 철딱서니가 없어서 그렇다지만 그게 어디 애들만 그런가? 누구는 이 시국에 어디 외제차를 절반 가까이 할인된 가격으로 사고는 그것으로 좋아라한다. 한쪽은 죽어라 죽어라하고 다른 한쪽은 신났다 신났다고 하니그것을 확실성의 세계로 붙들고 사는 우상의 나라라는 게 얼마나 더 무모한가.

 

나는 고2 아이에게 그만하겠다고 하고 돌려보낼 참이었다. ‘그런 애때문에 자꾸 신경을 쓰고 심지어 안정제를 더해 먹고는 마음을 졸여야 하는 내가 못 살겠어서 말이다. 억지로는 안 된다. 강제할 수가 없다. 그러니 여기까지만 하자, 하고 단단히 일러 그만두려고 했는데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라니! , 이 무모하기 짝이 없는 믿음의 세계여! 그러니 얘를 그냥 못하겠다고 오지 말라는 소리가 어디 입 밖으로 나와야 말이지? 정신과적인 문제이니 어디 상담을 받든 약물로 치료를 하든, 가라! 하고 내몰아버릴 생각이었는데 내 안에 이는 난데없는 안타까움에 속상함에 더해져 사랑스러움까지. 그러니 얘를 어쩐다? 어르고 달래어 오늘의 현실을 말해주고, 우리로서는 주의 도우심만을 구하는 수밖에. 그러자, 같이 기도하자! 하고 나는 아이와 함께 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니 성경은 우리의 사명이 축복하고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것이다. ‘모욕을 당한 즉 축복하고, 박해를 당한즉 참고이 무슨 비상식의 모순이며 불확실성의 무모함인가. 그런다고 해서 얘가 고마워하겠나, 그 부모가 고마워하겠나? 한 술 더 떠서 성경은 이르시기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

 

그러니 환장할 노릇이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6:28).”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오히려 그러는 나를 비웃듯이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없어 모욕감만 더하는데도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2:14).” 성경은 대체 왜 이러시는 것일까? 그렇듯 그만둘 생각으로 단단히 벼르고 약까지 먹고 준비하고 있던 마음인데, 아이를 마주하는 순간 아뿔싸, 주님의 마음이라니!’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19:22).” 그 아버지의 마음이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냥 안 보고 그만이면 될 텐데, 그럴 거였으면 오늘 날 인류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하여는 가만히 묵상하고 있으면 저절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어찌 여기까지 또 참으실까?

 

오늘의 내가 나로 주 앞에 세워지고 쓰임을 다할 수 있는 까닭은 내가 돌이켜 주의 마음에 합당한 자로 섰기 때문이 아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오늘에 있다. 은혜 아니고는 용서도 쓰임도 무엇에도 합당하지 못한 죄인인데. 나는 전날에 누구와 대화하면서 저의 주춤거리는 마음에 일갈했다. 부디 나처럼 먼 길을 돌지 않기를부끄럽지만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도 내가 내보일 수 있는 모습이란, 부디 나처럼 어리석은 길로 너무 멀리 돌아서 살아가지 않기를굳이 광야 40년의 인생이 가당키나 한가!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나는 오늘도 아침에 일찍 눈을 뜨고 말씀 앞에 엎드린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139:7-8).” 주밖에 나에게는 아무런 복이 없음을. 곧 나의 나 된 모든 것을 주께서 관여하시고 주관하여 주심을.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그리하여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왕상 8:39).” 내 안에도 여전히 극장의 우상시장의 우상종족의 우상동굴의 우상이 팽배하여서 수시로 애굽을 기웃거리며, 나의 이 무모하기만한 것 같은 믿음의 불확실성에서 오늘도 이 길이 맞나?’ 의심하고 있을 때,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주가 더하시는 말씀이라.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139:23-24).” 부디 나의 생은 온전히 주만 바라기를. 그리하여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16:2).” 이를 알고 바르게 서는 길은 오로지 말씀 앞에서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6:15).” 사람 볼 거 없다. 아이 대하는 일이 주를 마주하는 일이라. 누구의 사연은 주가 들려주시는 말씀이라. 그러하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139:1).” 오늘 나의 기도는 주가 아심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2-4).” 그러니 내가 어디로 숨으리이까.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7-8).”

 

그러므로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9-10).” 이는 곧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17).” 나는 날마다 말씀으로 놀란다. 그러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23).” 그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