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전봉석 2020. 5. 14. 06:57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이사야 20:5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시편 140:6

 

 

아들애는 자정을 기해 14일간의 자가 격리가 해제된다고 하였다. 아침 도시락을 먹고 나온다는 것을 자정에 맞춰 머물고 있던 호텔로 데리러 갔다. 30여 분 떨어진 곳일 뿐인데, 정말 오랜만에 먼 길을 운전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들이 돌아왔다. 열여섯에 떠나서 스물일곱이 되어 돌아온 셈이니 딱 10년의 시간이 흐른 셈이다. 나의 고질적인 예기불안은 그때부터 고착된 듯하다. 그러는 데 있어 내가 그처럼 의지하고 구하던 나의 구스와 애굽에 대하여 더는 의지할 대상이 아닌 게 되었다.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20:5).” 날마다 아침이면 새로운 말씀으로 나를 일깨우신다. 성경의 놀라운 작용이다. 다른 것이다. 내가 그처럼 바라던 구스는 무엇이고 자랑하던 애굽은 어떤 곳인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던 나라, 그 세계의 수고와 애씀이 더는 희망과 기대가 아니라 더는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기셨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본래는 나의 전투였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세계다. ‘그게 뭐 어때?’ 하는 합리주의와 타협의 나라다. 그런 친구들과 어울렸고, 그렇듯 나의 위로는 오늘의 이태원이었다. 그처럼 젊은이들이 사족을 못 쓰는 곳, 흥과 쾌락이 넘쳐나는 삶이었다.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의 결과는 미안함과 감사, 속상함과 긍휼하심이 한데 하였다. 늘 나 때문에 필리핀으로 보내진 것 같은 미안함은 그런 가운데서 주의 은총이 자라갔고, 날마다 억눌리는 속상함에는 주의 긍휼하심만이 나의 힘이 되시었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잘못은 우리 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구스는 무슨 죄며 애굽은 무슨 낭패인가. ‘이태원이 문제이겠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외면하는 죄의 문제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4:17).” 병적인 나는 너무 일찍 서둘러 아들애가 입국하여 격리된 호텔로 갔고 그 주변을 서너 바퀴 돌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주의 도우심이 어떠하였는가, 새삼스러웠다. 더는 허망하게 구스를 구하고 애굽을 향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미련하였다. 탕자가 나였다. 허망한 것을 행하고 바라였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오늘의 이태원이 항상 우리 곁에 있다(고전 6:9). 진정되는가싶던 전염병이 다시 우리 생활을 정지시키고 있는데도, 성소수자의 인권과 탄압을 운운하고 유흥업소의 영업과 손실을 우려하며, 살 궁리에 죽을 걱정은 못하는 모양이다. 사탄의 최종 무기가 무언가? 우리의 죽음이고, 죽음은 사람을 엄습하여 두려움을 조장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영적으로 나는 죽었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 오늘의 이 싸움은 단순히 유행하다 극복하는 전염병의 한 종류가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이를 알 때 이태원이 단순히 어느 지역의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님을, 바라던 구스와 그처럼 원하던 애굽이 단지 그러한 대상의 정도로 망각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오늘에도 여전하였고 나의 젊은 날을 나는 그렇듯 추구하고 바라며,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을 자부하였던 것이다. 이에 주께서 나를 멈춰 세우셨고 더는 전진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것이 비극적이었고 나를 좌절케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우리의 10년 세월은 하나님의 보정과 회복과 전혀 새로운 삶의 기틀이었다. 아들애가 나와 같이 10대의 시절을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여전히 그런 가운데 거하며 아등거리고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4:18).”

 

그때 나는 늘 내가 옳은 줄 알았다. ‘이게 뭐 어때서?’ 하는 투로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고, 이태원이나 구스나 애굽이나그 찬란한 젊음과 낭만의 세계를 만끽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내 안에는 이미 어려서부터 주를 알만한 속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육에 속한 삶을 선호하였고, 문학을 그리 이해하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치를 그 정도로 알았다. 나의 성공과 실패는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이와 같은 말씀이 곧 나를 두고 하시는 소린 걸 나는 알지 못했다. 애써 부정하였고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정도로만 여겼다. 그리하여 나는 탕자의 결말을 사랑한다. 정작 저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지 않고 나락으로 떨어져 돼지 여물통에 기식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며칠 전 누구에게 그와 유사하였던 나의 처지와 그날을 설명하며 감사하였다. 돌이켜 아버지의 집을 떠올리고, 나의 안에 본래 내재하였던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작동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 것이었으니. 그때 그가 강변역에서 인천에까지 오게 된 것도 그러한 결핍과 영혼의 갈급함 때문이 아니었겠나? 부디 그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기를. 나는 그럴 때마다 따박따박 10년의 세월이 껑충껑충 소진되는 세월이었다. 87학번으로 신학을 했어야 하는데 문학을 하였고, 그때 바라던 구스와 원하였던 애굽에서 부르신 게 강권하심으로 누구의 손길로 97학번 신학 학부를 편입하게 하신 거였다. 그럼에도 하다 말면서 학부를 끝내고 신대원 과정 한 학기를 하다 도로 곁길로 간 것이, 09학번으로 다시 붙들려 기어이 오늘에 이르기까지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애굽의 아들을 치셨던 것처럼 그때에 아들애를 더는 맡을 길 없어 필리핀 동생네로 보내게 하신 일이었고.

 

나는 아이가 귀국하여 묵고 있던 호텔을 서너 바퀴 돌며, 자정의 시각 차량도 인적도 없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울컥하였다. 이 모든 게 주의 은혜라. 어느 것 하나 은총이 아니었으면 벌써 죽어 마땅하였을 죄인인데. 나는 이제 말씀의 참맛을 안다. 아침마다 나를 새롭게 여시는 말씀이 이처럼 귀하다. 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새벽 두 시가 다 되도록 감회에 젖다 잠들었는데 본래처럼 깨우시고 말씀 앞에 다시 앉히셨으니!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140:6).” 나는 이처럼 묵상글 하나 작성하는 것으로 족하고 감지덕지하다. 아들이 아니라 종의 신분으로 돌아왔어도 될 나에게 아버지는 이처럼 더욱 극진히 맞으시고 잔치를 베푸시는 일이었으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15:22-23).” 세상은 어지럽고 전염병은 유행하여 여전히 두려움과 공포가 나를 엄습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돌보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오늘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더는 무엇으로도 이 기쁨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나의 구스와 애굽은 허망한 것이었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140:7).” 내가 상대했어야 하는 날들을 주께서 대신 그 전쟁을 치르셨고 나의 머리를 가려주셨다. 고로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12).” 나는 주 앞에 또는 주어진 나의 생애 앞에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리하여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13).” 나의 남은 날들은 영원토록 그러하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