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분깃이시라

전봉석 2020. 5. 16. 06:5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22: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142:5

 

 

믿었던 일이 가만 보면 발등을 찍는다. 사람도 그렇다. 모든 일의 원리이기도 한 것 같다.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인데 삭아 그 위에 걸어두었던 물건이 떨어질 것이라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22:25).” 말씀 앞에 오래 머문다. 이를 애통하며 바른 교훈을 받아야 하는데,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12-13).” 스스로 옳다 여기는 일에 있어서는 애나 어른이나, 사회나 국가나 결국 그 끝을 봐야 아는 일일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 엄히 이르시는 말씀 앞에서 두려워한다.

 

성경은 이처럼 쉽게 읽을 책이 아니다. 무심히 읽고 마는 일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자동차 키를 맡기는 것과 같다. 키를 꽂고 시동을 걸었다고 운전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주위와 집중과 또한 지식이 필요하다. 말씀 앞에서 두려워할 줄 아는 일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142:5).” 주께 의뢰하는 일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6).” 이는 이제 누구보다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도 주일 예배는 중요하다. 우리가 치르는 형식과 예식은 값지다. 그것으로 사적인 감정과 종교적인 소비를 억제할 수 있다. 가령 누가 사실혼관계로 그냥 동거를 하고 산다. 서로의 사랑과 신의를 신뢰한다. 굳이 예식을 치러 번거로운 절차를 바라지 않고, 법적으로 묶이고 싶지 않다. 서로를 믿는다. 한데 그 믿음은 위태로운 유리그릇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는 갈라섰다.

 

참 의식과 예식에는 귀한 내용이 담긴다. 마음만으로는 스스로 자신할 수 없는데, 나는 저들 부부 아닌 부부 같은 생활에 늘 주의를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서 오늘 시편의 시인은 기도한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7).” 곧 우리가 같은 공동체로 형성되는 일은 분명한 예식과 의식이 필요하다. 손을 들고 소리를 높이며 찬양하는 은사주의와 골방에 조용히 앉았는 퀘이커교도와 고교회파인 성공회와 부흥과 열성에 몸부림치는 침례교나 순복음교회와 보수주의를 자부하는 장로교회 들 모두모두는 저마다 개별적이나 예식으로 하나의 공동체가 이룬다. 이는 주님이 정하신 바이다. '나를 기념하라.'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4-25)." 곧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하는 오늘 시인의 기도를 그렇게 받는다

 

말씀을 받고 음미하고 이를 머금어 삼킬 때, 배앓이를 하는 까닭을 알겠다. 그것까지도 신성한 절차이다. 그리하여 주께서 물으신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10:26).” 나는 말씀을 어떻게 읽는가? 과연 어떤 참여가 이루어질까? 한 아이가 스승의 날이라고 케이크를 보내왔다. 전자시대라 전자화폐는 물론 전자선물이 서로의 대면을 생략하였다. 문자가 들어왔고, 나는 저의 표현에 가슴이 철렁했다. ‘저의 스승은 한 분이십니다.’ 이를 고마워할 수만은 없는 게 나의 가르침이나 관여가 참으로 미비하고 남루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주일 예배는? 하고 묻는 나의 말은 누추하게도 여겨진다. 입에 단데 배에 쓰다. 소화하기 힘든 말은 서로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니 생략할 것인가? ‘너는 어떻게 읽느냐?’ 하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은 참여를 독려하신다.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였다고 하자. 그러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12:26).” 우리의 예식은 단지 의식과 형식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관여이고 참여다. 누구에게 스승이 된다는 일은 그래서 나에게는 살 떨리는 일이다. 내가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저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는 없다. 늘 한계에 부딪친다. 그것은 저들 개인이 참여해야 하는 말씀의 세계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119:32).” 주가 넓히실 마음이지 스승이 또는 동거인이 그리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주를 섬길 때, 주를 섬기는 자들도 거기에 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다. 단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나는 이제 누가 됐든 만남을 지속하는 데 있어서는 말씀을 같이 나눈다. 말씀은 앞서 말이다. 말은 오해의 소지가 늘 있다. , 다르고 어, 다르다. 공중에 흩어지기 일쑤다. 한 마디에 열 마디의 말이 장황하게 따른다. 글은 다르다. 말이 말씀이 되어 함축된다. 성경은 모든 배경과 묘사와 여러 정황을 생략한다. 전달할 말만 담았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성경을 읽는 일은 위험하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어린아이가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누가 늘 성경을 열심히 읽는다. 논쟁이 잦다. 해석을 운운하고 번역의 문제를 지적한다. 또는 모순을 살핀다. 아는 게 병이다. 심지어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스스로 믿는 자로 여기려고 성경을 읽기도 한다. 또는 공격을 위해 읽기도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4:12).”

 

참 스승은 오직 한 분, 저는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곧 제자 하나를 둔다는 일은 자식 하나를 두는 일과 같다. 그러니 누구에게 선생이 되려 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다들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 1:7).” 나도 확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면서 누구에게 선생으로 사는 일은 그래서 살 떨린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교사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2-13).”

 

말씀을 읽고 배앓이를 하지 않는 성도는 없다. 점점 더 자신의 연약함을 마주할 따름이다. 그래서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단지 글자로 하지 않으시는 까닭은 글자는 죽은 것이다. 그 글자가 살아나야 한다. 말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듯이 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말씀을 듣는 일과 그 가운데 사는 일은 하나이다. 말에 있는 구어의 성격은 모든 배경과 상황과 묘사가 실제 나의 삶에서의 구구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드러난다. 곧 말씀으로 사는 일이란 배앓이처럼 고단하고 힘에 겨운 일이기도 하다. 하물며 스승이 된다는 일은 그 한 사람의 전부가 되는 일처럼 막중하기도 하다. 나는 늘 선생이란 호칭으로 살아왔다. 알게 모르게 누구를 가르치고 조언하고 권면하면서 말이다. 그 구어의 세계가 실제 나의 실상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저의 선생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는 어느 녀석의 고백이 하루 종일 나를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은 그래서이다. 그저 고마워하고 자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스승의 날이었던 어제, 나는 과연 누구에게 그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인사를 건네야 할 사람을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오늘 말씀은 경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22:25).” 단단히 박힌 못인 줄 알았으나 그것도 때가 되면 삭아서 부스러진다. 삶이란 그러하여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142:5).” 나는 다만 말씀으로 숨는다. 말씀으로 살고 말씀이 되길 원한다. 이에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1).”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6).” 그러할 때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