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전봉석 2020. 5. 17. 06:26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23:9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시편 143:1-2

 

 

사는 데 따른 말의 필연적인 쓰임은 때로 눈물겹다. 특히 밥벌이를 위한 말의 쓰임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그 이상의 수고가 따른다. 가령 아들애 핸드폰을 새로 했다. 그동안 필리핀에 있었으니 늘 남이 쓰던 것을 쓰다 처음으로 새것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최신형을 거의 공짜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매장마다 경쟁하듯 교묘한 방법으로 유치하는 것이다. 제휴카드를 끼고, 통신사를 옮기고, 자신들이 지원할 수 있는 금액까지 더하면 백만 원이 훌쩍 넘던 금액이 이렇게 저렇게 없어져 결과적으로 공짜가 되는 식이다. 소비자의 형편에 따라 맞춤으로 그 방식을 달리하는 것이니, 나는 누구의 해박한 설명에 정신이 다 아찔하였다. 아내는 용케도 그런 내용들을 이해하는데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집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방식으로 아버지 것까지 이참에 새로 하고 있으면서, 나는 말의 가치와 그 유용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성경은 글자에 앞서 말이다. 언어로 체계화되기 전에 말로 전달되었고, 구어로 구전되어 오늘의 말씀을 이루었다. 하나님은 말로 세계를 창조하셨다. 말로 찾아오시고 말로 다스리셨다. 말은 그 의미를 담고 방식을 전달한다. 말의 세계는 현란하거나 거칠다. 오늘 말씀은 이를 규정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23:9).” 말로 하는 말의 세계는 신뢰도에 따라 강도가 다르다. 누구의 말은 무르고 누구의 말은 단단하다. 그래서 어떤 말을 물릴 수 없고 어떤 말은 또 금세 달리한다. 같은 말도 그 의미가 다른데 이는 반영되는 세계의 정도다. 누구는 말로 하면 그러는가보다 하지만 누구는 말이 곧 그를 반영한다. 앞서 떠벌이는 말은 바람 잘날 없는 나뭇가지 같다. 바람에 따라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린다. 하지만 나무는 뽑히지 않는 이상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킨다. 말의 세계의 차별성이다.

 

나는 종종 말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이 눈물겹다. 또는 어떤 이의 말이 부질없다. 그러나 말은 어떠하든, 어떻게 달리하든 저마다의 세계를 가진다. 주말이라 핸드폰 매장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는 요란한 음악과 함께 누구는 춤을 추고 누구는 꺽다리 분장을 하고 풍선을 나눠주며, 누구는 종일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구매방식을 고르느라 쉴 새 없이 설명을 덧붙였다. 말과 말의 경계는 모호하였고 저마다의 직분(?)에 따라 그 말의 방식을 달리하였다. 그러나 목적은 하나여서 누가 더 많은 사람을 가입시켜 새로운 핸드폰으로 구매하게 하느냐 하는 거였는데. 말은 남는 게 없는 세계인 것 같으나 말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돌아와 손에 쥔 새 핸드폰을 조작하고 손에 익히면서, 들었던 말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고 현실에서 처리해야 하는 비용은 고스란히 그 값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내는 이해한 것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일목요연하게 적어두어, 나이든 시아버지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데서 나는 한 번 더 경이로웠다. 아내의 이해는 단순하지 않았고 두어 시간 매장에서 정신이 쏙 빠졌던 나로서는, ‘그래서 결국 얼마에 산 셈이다.’ 하는 명료한 정리만 이해가 되었다. 그 긴 시간과 숱한 말의 세계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정돈되어 그대로 남아 청구될 것이다.

 

969세를 살았던 인류 가운데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의 여생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정돈되는 것으로 족하였으니,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5:25-27).” 그러니까 두 시간 가까이 설명을 듣고 이리저리 구성하여 백만 원이 넘는 것을 공짜로 샀다는 식의 산술적인 정돈도 같다. 인생마다 구구한 말들의 세계가 있으나 족한 것은 그리하여 죽겠다는 소리다. 종종 나의 묵상글쓰기도 같다. 이처럼 쓰다보면 글자 크기 14포인트, 줄 간격 180으로, 다섯 장을 조금 넘기면서 장황하게 서술되지만 결론은 찬양이다. 주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느낌이나 마음이 풍성하였던 결심은 솜사탕이나 공갈빵처럼 한껏 부풀었다가 돌아서기 무섭게 한 줌도 안 되게 폭삭, 꺼져버리고는 한다. 실제의 삶은 고약하여서 애써 불었던 풍선을 바늘로 뻥, 터뜨리는 것처럼 순식간이다. 어쨌든 매달 얼마를 소비해야 하고 소비에 따른 수입은 그 얼굴에 땀방울이 맺히는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 실존이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3:18-19).”

 

그러니 우리의 세계는 말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언어의 세계이고, 말의 무게는 가혹하다. 한 문장의 말은 문어체로 쓰였을 때와 구어체로 풀어놓았을 때의 세계가 다르다. 나는 종종 어느 아이의 말을 듣다 그 말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어 자신할 수 없다. 아이는 장담하고 호기롭게 대답하지만 그리 한 말의 세계는 엄청난 수고와 인내를 필요로 하는데, 아이는 번번이 뻥, 터진 말이 전부다. 공갈이고 허풍만 남는다. 핸드폰 매장에서 몇 시간째 들은 말들은 아내의 일목요연한 메모장 반바닥으로 정리가 끝났지만 실제의 값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시간의 실제 무게는 2년 약정 3년 할부조건이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하는 말씀처럼 우리의 말의 세계는 실제가 되면서 실재의 엄중함은 가혹하다. 성경의 세계는 말로 구술되었으나 살아서 삶으로 정돈이 되는 세계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잘 기술하였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1:1-2).” 결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2:1).” 오늘 우리 믿음의 삶이란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1-2).” 이 얼마나 명징한가?

 

아내의 메모장은 간단하지만 실제의 삶은 구구하여서, 자칫 말씀의 세계는 허무맹랑한 말의 세계로 들릴 수 있겠으나 요한의 정의는 엄연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곧 우리 하나님의 세계는 말의 세계이나 공갈빵이나 솜사탕처럼 부풀린 세계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실존으로 오신 말의 세계다. 그저 말뿐인 세계가 아니라 실재 들어갈 영생의 세계다. 오늘 이사야는 “두로에 관한 경고라(23:1).” 하고 우리의 주목을 끈다.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4).” 그리고 방향을 제시한다.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5).” 말은 서로에게 들려지나 이에 따른 경고의 세계는 들을 귀 있는 자의 세계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5:21-23).” 에녹은 엄중한 말의 세계를 들었고 믿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말로 그치디 않았고, 므두셀라가 죽는 날에 노아의 홍수 신판은 실행되었다. 하나님의 세계는 실재의 말의 세계다. 

 

오늘도 성경은 말을 한다. “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 해변 주민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23:6).” 이를 정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9).”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그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게 하시고(11).” 그 믿음의 정도가 삶의 실제가 되어 우리 존재는 비로소 말의 실재가 된다. 허풍의 세계가 아닌 실재의 실제가 되는 일상이다. 한바닥도 안 되게 정리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닌 아내의 메모장 안의 세계는 '이제' 실제 살면서 살아서 갚아야 하고 벌어서 메워야 하는 실재의 값을 요구할 것이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하는 세계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다.' 단순히 새 제품의 핸드폰이 내 손에 주어졌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구원도 단순히 죄사함을 받았다고 끝이 아니다. 죄사함은 이제 구원의 시작이다. 심판은 영생의 시작이다. 만일 그대로 영생이 주어진다면 영원히 그 삶으로 무엇을 할 것인기? 천국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살며 말씀의 세계를 누려야 하는데, 정작 성경의 세계는 알지 못하고 말씀의 실제를 살지 못한다면!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143:1).”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에도 기도한다. 나의 묵상은 부풀려져 풍선껌처럼 오전이 되기 전에 뻥, 터지고 사라질 것이나, 남은 그 지독한 현실에서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2).” 오직 나는 주의 긍휼하심만을 붙들고 그 앞에 엎드릴 따름이다. 그리하여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8).” 다른 더 좋은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고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10).” 다만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11).” 이로써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