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사야 27:3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편 147:11
주가 우리를 밤낮으로 간수하신다. 우리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길은 경외함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일이다. 말씀 앞에 오래 머문다. 주께 기도하는 한 가지, 내게 두신 날들이 주께 바르게 쓰임받기를. 기도는 우리로 자유롭게 한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그러한 기도는 간단하지 않다. 기도는 그 마음의 소원이다.
그릇된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그리하여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 나의 골방! 아무도 알 수 없는, 오직 나와 주님만의 내밀한 곳.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곁에 두신 저 한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마주하고 대하는 일이겠다. 내 판단이나 기준으로가 아니라 주를 향한 온전함으로. 주의 영이 계시는 곳.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모처럼 아이가 용기를 내어 글방에 왔다. 공황이 오고 멀리 오갈갈 수 없던 처지에서 많이 좋아졌다. 그러는 동안 가까운 교회에서 주일을 지켰지만 서로의 묵상글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데 발판이 되어주었다. 마침 아들애와 같은 공부를 하며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 서로들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나의 말은 종종 군더더기처럼 안 해도 될 말들처럼 속으로 삼키고는 한다. 당부하고 싶고 또 일러주고 싶은 게 많은데, 그것을 안으로 삼키며 주께 아뢰는 것이 ‘나의 기도’가 된다. 곧 저 아이에게 할 말을 주께 한다. 주께 아룀으로 나의 말들은 굳이 안 해도 될 말이 되어 내 안에서 주가 거하시는 곳의 대화가 된다. 그렇듯 말을 안 해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이 계심으로 신뢰한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 4:6-7).”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다.
우리로 각자의 골방으로 이끄시는 까닭은 주의 사랑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이와 같은 말씀을 한 입 머금고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은 삼킨다. 주가 이루시기를. 그리하여 나는 아들애가 헤어진 아이와는 어찌 그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지. 모처럼 온 아이가 그 마음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 교회는 어찌할 것인지. 뭐라도 내가 저들에게 해야 하는 말들이 많은 것 같은데, 안으로 삼켜 주께 토로한다. 그럼에도 나의 조바심에 안달에 복달에 들끓는 마음은 저 혼자 들썽거리지만. 그럴수록 주를 의뢰하는 연습을 하고, 입을 다문다. 쉽지 않아 나는 나의 골방으로 들어가 주께 기도한다. 주께서는 다 아시면서도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곧 골방에서 나와 마주앉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4).” 그러니 중언부언할 거 없다. 가만히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다 아시면서 내 안에 두시는 안달복달은 나로 골방에 이끄시는 손길이기도 하다. 나의 불안증이 그러하고 마음의 조바심으로 초조할 때도 그러하다. 나는 아이에게 굳건하게 이겨내고 우리 교회로 다시 오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연습중이다. 연습이란 그리 자꾸 안달을 부려서다.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는데, 나는 이를 경계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나는 주께 아뢰길, 안 할 말을 말하지 않게 하시고, 할 말도 절제함으로 골방에서 주께 아뢰기를. 보면 그게 말이란 참 허망하여서 대부분이 안 해도 될 말들이고, 해야 할 말이었어도 지니면 또 굳이 말이 되어야 했던 것은 아니어서. 우린 이미 자유하였다. 그러므로 스스로 멍에를 맬 따름이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10).” 그러면서 이를 종교화하고, 규격화하고, 의식화한다. 온통 사이비가 느는 까닭이다. 신앙훈련을 빙자한 허황된 오늘 날의 ‘훈련’에 대하여.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15).” 그러하기까지 치르신 주의 죽으심과 부활의 값은 자유함이다. 이를 허사로 만드는 것이 실은 교회이고 오늘 날의 종교이고 신앙교육이다. 인위적으로 성경을 필사하고, 의무적으로 헌신과 봉사를 강요당한다. 이와 같은 훈련(?)은 더한 어려움에 굴복하는 꼴이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 5:6-7).” 서로의 간섭이 서로를 굴복하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 나와 하나님 사이를 훼방한다. 행여 나의 말이 또는 참견이 아이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걸림이 될까봐. 나는 이를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이는 우리를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셨는데 오히려 그것으로 짐을 지워 감당하지 못하게 하고 서로를 더욱 억압하는 것이었으니. 나는 '어느 교회'의 어떤 '신앙 훈련'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본래가 이단이고 사이비 종파였으면 또 모르겠는데, 정통 보수교단이고 정상적인(?) 총회의 한 교회라고 하는데. 그러니 그게 참.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말씀 앞에서 면구스러울 따름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나? 마치 내가, 우리 교회가 말씀 위에, 성령 위에 있지는 않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리지는 않나? 나는 아이들에게 굳이 안 해도 될 말과 해야 하는 말을 구분하다 이를 몽땅 싸들고 골방으로 들어간다. 주께 아뢴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면 주께서 다루시고, 간수하여 주시기를. 오늘 말씀을 나는 그리 되새긴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주가 다루시는 삶이라. 그 영혼이라. 우리의 복은 충분하였다. 오히려 그릇되게 망치고 훼손하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을 위해, 그처럼 사람들 앞에서의 교회와 말씀과 신앙을 자랑하려 하는 것이었으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1).” 그러므로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던들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던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사 27:7).” 주님의 사랑은 주님도 주체할 길이 없으시다. 그 말씀을, 주님의 마음을 주님도 바꾸실 수 없다. 죄악된 사람들도 그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러할진대 천하의 사랑이신 구주되신 하나님의 마음이랴. 주가 하신다.
고로 우리의 순종은 사랑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죽음으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이가 고작 우리의 말에 의해 좌지우지 되시겠나?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시 147:1).” 오직 주를 바라는 일. 그것은 자원하는 마음이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나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 그래서 나에게는 매번 실패하지만 연습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시 147:6).” 고로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