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전봉석 2020. 5. 24. 06:53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이사야 30:18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6

 

 

우리가 주의 도우심과 인자하심을 기다리는 것은 주께서 그처럼 우리를 기다리시는 일과 같다. 때론 기다리셔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마음에 두시고 나로 하여금 주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30:18).” 기다림은 상호작용에 의한 신뢰를 더한다. 가령 느닷없이 엄마가 교회에 가지 말라고 했다며 아이가 문자를 했다. 갑자기? 하고 묻자 아이의 장황한 설명이 돌아왔다.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하고 나의 대답은 간결하였다. 실은 엄마가 그러라고 한 것인지 자신의 싫어하는 마음을 그리 거짓말로 하는 것인지, 나는 분간하지 않았다. 상호간의 신뢰가 옅어졌거나 사라진 까닭이다. 그러면서도 뭐가 얹힌 듯 명치끝이 뻐근하였다. 주가 연결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관계는 허망할 따름이다.

 

주를 바라는 삶이란 조용하고 들레지 않는다. 시끄럽게 떠들고 호들갑떤다고 해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주의 마음으로가 아니면 어지러울 뿐이다. 일찍이 지혜자는 인생의 이치를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그러나 주의 시간은 흐른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1:4-7).” 마치 모든 게 끝장날 것 같은 사이의 이별도 아무렇지 않게 흐르는 세월 앞에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나는 들레지 않고 조용히 아이의 일을 마음에 새기다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거룩은 하나님의 섭리 앞에 자신을 굴복하는 일이다. 조용하고, 사람들과 만나 낄낄거리는 일을 꺼리고, 은둔하고, 고요하고, 온화하다. 이는 목사의 삶으로는 걸맞지 않는 게 되었다.

 

관여하고 참견하고 돌보고 나서서 마치 선봉에 서서 깃발을 들어야 할 것 같은 시대에, 전체적으로 잘 정돈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서부터 평온이 깃든다. 너무 요란하게 굴 거 없다. 읽는 바를 즐기는 것, 주어지는 삶에 순종하는 일. 곧 주의 말씀에 집중하는 일이란 사람이 어떠하든, 누가 뭐라 판단하거나 다가오고 멀어지거나 그냥, 그러려니하고 다소 관조적인 자세로 마주하는 일이다. 가끔 나는 부질없는 소리가 될 줄 알면서도 내가 널 참 많이 생각한다.’ 하는 말을 아이에게 하곤 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찌 대하시는가를 말해주고 싶어서였다. 아니면 스스로도 혐오하는 너 같은 애, 나 같은 사람을 누가 굳이 생각하고 위하고 기다려주겠나? 하는 소리였는데. 나는 아이의 맹랑한 거짓말에 더는 맞장구치듯 들렐 거 없다. ‘그래라 그럼.’ 하는 대답이 차가워서 내가 되레 치를 떨어야 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이는 은유이면서 동시에 사실이다. 돌려 말하는 것 같으나 직설적이다.

 

말씀이 내 안에 거하심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150:6).” 그 호흡의 힘에 의한다. 우리가 말씀으로 산다고 해서 일상을 벗어나 구도사의 삶으로 수도원에 들어앉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일, 저는 자라고 성장하여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억지로 누구를 이끌 수 없듯이 내 임의로 나 자신을 주장할 수도 없다. 내가 생산하고 실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과 일치하는 삶으로 충분하다. 이는 이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묻는 게 아니라, 그냥 첨벙, 하고 뛰어드는 것이다. 아직 마르지 않은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것이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11:31).” 이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을 이행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를 붙들고 주만 바라는 일, 조용히 주 앞에 순종하는 삶이란 주어진 것들로부터 오직 주만 바라는 일. 너무 애쓰지 않고, 속 끓이지도 않고, 덤덤히 또한 부단히 주어진 길을 가는 것.

 

아이의 문자 하나가 나를 휘저으려고 할 때 나는 다만 주를 바라였다. 누가 오고 안 오고, 내가 무얼 하고 안 하고, 그에 앞에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그 배후에 계신다. 묵상은 그런 점에서 주의 뜻을 더욱 기린다. 내 의지와 생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변덕스럽기만 하다. 주의 사랑은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기까지 하신 사랑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결국 우리를 무궁한 사랑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31:3).” 이는 그저 막연하게 그렇다는 소리가 일상에서도 그리 취하고 행해야 하는 삶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14:9).” 그러니까 자꾸 일의 결과는 허망하고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는 것 같고 아이 하나도 변변하게 인도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사탄은 이를 틈타 내 안에 자괴감을 심어주고 우울감과 도덕적으로 미안함도 넣어두어 때론 불안이 또는 우울이 나를 엄습하게 되지만, 그것까지도 주를 향하게 하는 일상이다. 우린 결코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니다.’ 선불하여 득도하는 삶을 살라는 게 아니라. 좌충우돌 또 똑같이 화내고 속상하고 스스로를 탓하며 고질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도 이제 주를 바란다.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것으로 선을 이루게 하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그것이 설령 우리를 노엽게 하게 안 믿는 자들의 눈에 조롱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라 해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시는 이 한 마디면 모든 게 평정이 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그에 따른 이유와 목적이 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 우리가 평온하여 세상 것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다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일관 된 하나님의 계시 안에 들어가는 일이다. 묵상은 그런 점에서 세상과의 단절도 아니고 신탁을 바라는 우상숭배적인 일도 아니며 오직 한 가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오늘 시편의 말씀도 150장의 긴 호흡으로 기술된, 울고 웃고 간구하고 탄식하며 논쟁하고 원망하다 주의 도우심을 구하고 바라는, 기도의 자유함에 있어서도 같은 맥락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150:6).” 다만 우리의 할 일은 단순하였다. 이는 그 성소 안에서의 일이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1).” 오늘 사는 여기, 이 일상의 날들이 그의 성소이다. 우리가 주를 찬양한다는 일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보다 더 크신 주의 성소에서 그의 권능의 궁창을 살기 때문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