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사야 32:16-1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편 2:7
곧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11).” 오늘 시편 2편의 말씀이 그 길을 제시한다. 사느라 사는 데 너무 혈안이 되어서 정작 사는 이유도 모르고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는 아들이 너무 공부에 열중하는 것이 안쓰럽다. 그래야 뭘 해도 하긴 그래야겠으나 내가 천성이 느린 사람이라 그러한가. 아침에 깊이 잠든 아들 녀석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교회에서 공부하다 소파에 누워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데 그 모습이 가슴 저렸다.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데 그렇듯 족히 2년 이상은 각오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치열하게 경쟁하고 거길 비집고 들어가 합격을 하고 출세를 하고 성공을 한다고 한들. 나는 자꾸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많다.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6-17).” 주의 공의로 우리를 다스리심을. 저렇듯 필리핀에서 생활했을 걸 생각하면, 나는 그 모습이 기특하기보다 가련하다.
우리 안의 믿음은 참인가. 때론 거짓 믿음도 참 믿음보다 열심이어서 마술사 시몬의 믿음이 가짜인 줄 누가 알았겠나.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행 8:9-10).” 저의 열심을 따라갈 자 없었다. 세상은 온통 우리를 부추긴다. 그것을 또 마치 신앙의 척도로 삼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본래 사람은 선하지 않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스스로 견줄 수 없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 2:23-24).” 자칭 열심히는 어려운 일이라,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5).”
그러니 뭐라 한들. 젊을 때 그리 열심을 다해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은 필요하겠으나, 그러므로 나는 자꾸 하나님께만 드릴 말씀이 많아진다. 하라 할 수도 없고 하지 말라 할 수도 없고, 다들 취업이 어렵고 말 그대로 먹고 사는 문제가 생의 가중한 무게로 짓누르는 일이었으니. 같은 층 교회가 있던 자리가 말끔히 비워졌다. 30평 규모에 스터디카페를 들여 교회를 같이 운영하면 어떨까? 양 옆으로 1인실 공부방을 만들어서… 이런저런 궁리에 모두들 좋은 생각이라고 하고 할 거면 제대로(?) 해보자고 부추겼다. 나는 늘 생각이 많다.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늘었다. 이렇듯 가만히 있기보다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해보면 어떠냐는 게 중론이다. 주께서 확신을 더하시고, 그 길로 인도하실 것을. 그러한 나의 모습은 우유부단함으로 비치고 미적거리는 태도로 보인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 교회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엄중하게 들렸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2-23).” 성경 가운데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뭘 한다고 했는데, 나름 애쓰고 수고하여 주의 뜻을 따른다고 따른 것인데, 어느 날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신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우리 마음이란 게 얼마나 얍삽한가. 염치도 없이 잔꾀를 부리고 늘 가만 보면 자기 잇속만 차리는 게 본래 우리들 마음이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9-11).”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나?
나는 다만 말씀을 끌어다 편다.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소모적인 시간으로’ 하루를 보낸다. 아들의 열심이 또는 저마다의 수고와 애씀이 눈물겨운 까닭은 행여 그것으로 자신의 열심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는 자기 성취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모두가 응원하는데 나는 자꾸 철딱서니 없는 소리처럼, 너무 애쓰지 마. 힘들면 그만 해. 하는 소릴 해대고 있으니…. 우리의 가짜가 너무 진짜 같아서 진짜가 정말 진짜인지 구분하기가 힘들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6:14).” 말씀 붙들고 말씀으로 씨름하며 살기를. 물론 목사가 돼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직업군에서 살든, 그런데 그게 세상이란 게 그 직업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니. 누가 음식점을 하는데 술도 판단다. 누가 노래방을 하는데 도우미도 부른단다. 사업을 하든 장사를 하든 그러려면 감세와 절세를 위해 온갖 편법을 다 동원해야 하는 일인데… 나는 자꾸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고, 아내와 아이들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뜬구름 잡는 소리로나 듣는다.
가령 장모의 동대문 집 한 칸을 두고 요즘 자주 설왕설래한다. 평당 3천이면 얼만데, 손위처남은 4천을 받을 수 있다하고 그때까지 기다리려니까 곁에서 지분거리는 족속이 있고, 실제 그것으로 먼 친척이나 가족의 불화가 일 게 뻔하고, 그러니 나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지금 얼른 손을 떼시라 이르고, 그런 나의 말은 사회물정 모르는 목사 나부랭이의 말로나 듣는 것 같아 전혀 반영이 안 되는 것이니, 어쩌겠나. 쥔 것을 붙들고 사는 것이고, 사느라 드는 손아귀 힘은 애쓰고 수고함으로 고단한 인생으로 흘러가는 것일 텐데. 그저 평강하다 평강하다, 괜찮다 괜찮다, 잘 될 것이라는 말만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우리 방식의 믿음으로는 이룰 수 있는 구원은 없다.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막 4:6, 17, 22).”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늘 이 삶에 확장되는 의미가 깊고도 넓다.
우리의 수고와 애씀이 가시덩굴일 수 있고 땅 속에 묻힌 돌들일 수 있다. 겉으로는 금세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것 같으나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줄기를 뻗고 자랄 수가 없는 것이니, 나는 무모하지만 가끔씩 철딱서니 없는 애비처럼 ‘너무 열심히 하지 마.’ 하고 아들애에게 말한다. 우리 삶의 목적은 간단하다. 주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할 따름이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 11:44).”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거룩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 열심히 일궈 얻어지는 성공의 사례가 아니다. 경쟁률 높은 관문을 통과하여 버젓이 그 사회에서 최고가 되는 게 목적이 아니다. 만물은 다 부끄러울 따름이라.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한 날의 삶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영광과 찬송을 올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시몬과 같은 열심을 부추기고 추앙하는 경우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18-20).” 나는 때로 우리의 게으름보다 우리의 열심이 두렵다. 스스로 애쓰고 수고하는 노력이 불안하다. 아 “내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오늘 시편의 말씀이 이토록 가슴을 쩡쩡 울리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이사야는 덧붙인다.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사 32:18-19).” 우리는 늘 주의 뜻 안에서 거하는 것이 안전이고 평안함이라. 그러므로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