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사야 34:16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시편 4:4
말씀을 따라 가는 일은, 때로 낯설다. 잘 안다고 여기고 익숙하다고 생각하던 것이 순간 두려움으로 또는 강한 어조의 경고로 들릴 때가 있다. 오늘 말씀도 주의 날에 그 진노하심을 주목하게 한다.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복이라. 그리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바른 두려움은 옳은 길을 가게 한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시 4:4).” 주께서 하시는 일은 참으로 기이하다. 철학과 이성의 대륙 유럽으로 처음 복음이 들어갈 때에도 난다 긴다 하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별다른 관심도 없는 어느 작은 어촌 마을에, 지금이나 당대에나 소외되었던 여성 몇을 중심으로 복음이 전하여진 것이었으니….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1-14).”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실 때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여자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하심이었는데,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나 오늘에 이르러 전 세계에 복음이 증명되기까지… 예수는 ‘학문 없는 범인’이었다. 그저 평범하여 오히려 그게 더 낯설던, 그런 자들의 입을 통해 증거 되고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4:13).” 이를 바울의 표현으로 다시 되새기면 그 의미는 더한층 새로워진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새삼 이와 같은 말씀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아이와 같이 있으면서 ‘도대체 이런 아이에게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알아듣기는 할까?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은 아닐까?’ 하는 회의와 갈등이 일고 있을 때였다. 또(?) 그러는 것이겠으나, 요즘 유튜브를 하겠다고 혼자 녹화를 하고 편집을 하고 이것저것 배워가면서 집중을 하는 터이다. 물론 언제 또 시들하여 이 변덕이 잦아들지 모를 일이고, 그러니까 가족들도 지쳐서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구독자가 둘뿐인데, 같이 교회에 나오는 누구와 나뿐이었다. 형도 엄마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아이가 노래하는 동영상을 보내고 ‘좋아요’ 좀 누르라고 하자, ‘난 그런 거 싫어하는데…’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냥 그런 게 아니라, 네 조카아이다! 하고 답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저들 심정이나 그들의 외면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아이는 아침마다 올라와 일기를 쓴다. 무슨 내용인지, 나는 답답하면서도 같이 읽고 응원한다. 색칠도 하고, 뜻 모를 책도 읽고 영어도 외우다, 우리는 같이 성경을 읽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나 하는 것일까? 아홉 시도 안 되어 오는 아이에게 내가 지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내 안에도 이는 ‘나는 이런 거 싫어하는데…’ 하는 마음을 주께 내어드리기를 기도한다. 아이 때문에 유튜브에 가입을 하면서, 저의 말에 대꾸하면서, 저의 뜻 모를 기도 내용에 ‘아멘’ 하고 화답하면서, 나도 외면하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보다 보잘것없는 이가 또 있었나? 저는 군대를 이끌 권세도 없고 학문으로 무장한 학위도 없으며 재력 있는 가문의 자손도 아니었으며, 고작 ‘어린양’으로,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그렇게 가난한 자들에게서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처럼 확신을 갖고 증거하던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 회의가 일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2-3).” 그러자 예수님의 답은 의외로 돌아왔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4-5).” 별 볼 일 없고 하찮기까지 한 이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다. 다들 나름의 학문과 학식과 학위를 가지고 그것을 스펙으로 내세워 목회를 해야 먹히는 세상에서 이와 같은 말씀은 나를 위로 하시는가, 아니면 자극하시는가?!
아이와 점심을 같이 먹고 돌려보낼 때면 나는 늘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싶어진다. 나름 ‘괜찮은 아이들’은 다들 떠나고, 더는 좀 ‘정상적인 아이들’은 오지도 않고… <공부방>으로 오는 아이들의 형국은 일부러 그러시는가싶게, 다들 참… 속상하다. 자폐성 아이가 오고, 지능이 떨어지는 것인지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알아듣기는커녕 그러는 선생에게 욕질이나 해대며 반항하기 일쑤인 아이가 태반이고,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정상적인 가정’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아내는 종종 ‘누구를 위해 기도해줘’ 하며 저들의 사정을 알린다. 그런데 이건 일부러 그러시는지, 그러다 좀 나아지려나싶으면 속된 말로 ‘쌩까듯’ 그만두고 만다. 두 아이는 심지어 일 년치 가까운 교육비도 안 내고 오지 않는다. 나는 아내의 속 끓이는 마음이 오히려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러니 우리의 사명이란 게 그저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구차하고 한심하고 서러운 일이겠나? 주의 마음이 아니고는, 주의 사랑이 아니라면 어찌 저런(!) 아이들을 상대하고 감당할 수 있겠나?
물론 세상에 의인은 없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런 가운데 우리는 지금 의로운 일을 행하고 있다는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를 맡기시는 이를 묵상함이다. 우리야말로 뭐라고? 예수님을 닮기는커녕 세상 위인도 닮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렇듯 하등에 쓸모없는 삶을 사는 것 같으나 이 모든 일은 복음이 증거 되어지는 경로라는 믿음을 붙든다. 말씀으로만 나는 경탄한다. 결국은 내가 아니라 나를 사용하시는 이의 능력으로다. 우리 가정이 아니라 하찮고 보잘것없는 우리 가정을 통해 이루시는 주님의 역사다. 나는 이를 생각할 때면 힘들다가도 투정을 멈추고, 외면하고 싫증내다가도 두려우면서 놀랍다. 일부러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닌데, 나는 언제부턴가 묵상으로밖에는 살 수가 없다. 마치 관상수도자처럼 번잡스러운 만남들과의 인연을 멀리하고, 돈이 될 만한? 뭔가 발전적인? 새로운 도약의 무엇을 꿈꾸지 않는다. 주신 바 오늘 이 은혜로 족한 것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음미하며 알겠다(마 11:5).
진작에는 그것이 나였다. 하등에 쓸모없을 뿐 아니라, 이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누구보다 싫어하던 나였는데,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엄연히 그게 나였지 않았겠나?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면구스럽고 염치가 없을 따름이다. 차마 오늘의 사연을 감히 주님의 사역이라 말하기조차 민망하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점심을 먹고 아이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짠한 마음이 들어, 그저 값싼 동정이거나 안쓰러운 마음뿐이겠나? 물끄러미 쳐다보다 아내가 팔을 끌었다. ‘에휴, 불쌍한 것’ 하고 나는 나도 모르게 한탄이 나오자, 아내는 한술 더 떠서 ‘당신이 더 불쌍해’ 하고 말했다. 우리네 모든 인생은 불쌍하다. 가련하고 한심할 따름이다. 주의 은혜와 은총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좀 낫다고 여기는 삶이나 그저 그런 삶이나 아주 콩가루 같은 삶이나 … 그 어떤 생도 스스로는 희망이 없다. 복음만이 살 길이다. 말씀만으로밖에 길을 얻을 수 없다.
오늘 이사야가 진술하고 있는 경고의 목소리를 듣는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인데, 우리가 믿거나 안 믿거나. 알거나 모르거나. 외면하고 부정하거나 긍정하고 가까이 하가나…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시 4:4).” 그리하여 주께 아뢰기를,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6).” 주께서 이루어 가시는 세계에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7).” 아이나 그 아이들의 가정을 볼 것도 없고, 저들의 딱하고 불쌍한 처지를 한탄할 것도 없이 모두가 답답한 지경이라. 그러므로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이 모든 게 은혜뿐인 것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아침 일찍 눈을 떠서 말씀 앞에 앉았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 4: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