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전봉석 2020. 5. 29. 06:39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이사야 35:3-4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5:11

 

 

주의 힘으로 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길이다. 여러 개 가운데 하나, 그 일부가 아니다. 하나밖에 없는 모든 것의 전부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굳이 아니어도 되는 길이면 갈 수 없다. 누가 사역을 하고 안 하고, 하면 어디서, 어떻게를 두고 여러 해 생각이 많아 그리 말해주었다. 뭉그적거리고 생각이 많다는 것은 행동하기를 미루는 일이다. 실은 싫은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나아갈 것인지, 생각하기로 행동하기를 대신할 것인지. 같은 내용의 사연은 듣는 사람에게 지루하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여간 고역이 아닐 거였다. 아이가 오지 않았다. 내가 맡은 전부이면서도 나는 은근히 좋았다. 그럼 더 편하고 헐거운 하루일 것 같았는데 유난히 더 불안해하고, 안정제를 자주 찾은 하루였다. 왜 이러지? 하고 묻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내 몸의 일도 내가 아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의 일부분일 뿐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야.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은 보기보다 간단하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자신이 싫으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듯 구는 일은 서로에게 면구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주시지만 그것이 내 마음인지 주신 마음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럴 때 세상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인가,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실제 열에 아홉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바라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살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내 기분과 사정과 형편을 고려하여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경은 내 뜻과 참 다르다. 하나님의 생각은 번번이 나의 생각을 추월한다. 이럴 줄 알았는데 저런 마음이고, 저럴 줄 알았는데 이런 상황이 되기 일쑤니!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55:8-9).”

 

그럴 때 흔히 우리가 하는 행동은 미적거리고 주저하는 것이다. 생각해보고, 기도해보고, 조금만 더 말씀을 찾아보고하는 식으로 자신의 주저함을 감춘다. 나태함을 포장하는 것이다. 내 취향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본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도 안 그러는데 하나님은 종종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시고,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신다. 내가 믿고 의지하고 싶은 성경과 실제의 삶은 그렇게 다른 것이다. 가령 옆 단지, 방 세 개짜리 집이 될 줄 알았다. 그 정도는 해주실 거라 여겼다. 지난해에도 안 됐으니 이번에는 되겠거니 했었다. 그럴 때 내 마음에는 두 갈래의 길이 놓인다. 다 뜻이 계시겠지! 하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을 무던히 일구어 가든가, 아니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다른 것을 찾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운운하면 나의 고집을 꺾지 않든가. 이도저도 아닌 것으로 해서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먼 길로 돌아서 가곤 하는지! 그러나 그럴 때 가장 슬기로운 자세는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삼하 7:21).” 하고 주를 신뢰하고 보는 일이다. 그럼 영락없이 내가 틀렸다. 주님이 항상 옳으시다.

 

하지만 말이 쉬워 주의 뜻이지 그럼 그 증표가 무엇인가? 어떤 저명한 이의 확신에 찬 조언인가? 신비적인 신호? 기어이 우리에게 벌어지는 난데없는 어떤 일? 뭔가 대단한 무엇? 그런데 일상은 소소하여 늘 그게 그거 같으니까. 아,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을 위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이 모든 큰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대상 17:9).” 결국 우리로 알게 하신다는 것은 기다리며 묵묵히 준행하는 것뿐이다. 세상에서 받는 교육은 그럴 때 뭔가 하라는 것이고, 다른 길을 찾아 더 열심히 하는 게 주의 일일 것이라 부추긴다. 만일 노아가 그 심정으로 시달렸다면 어땠을까? 방주를 짓는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지, 무려 12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은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범주의 시간 단위이다. 미디안 광야로 쫓겨가서 비루한 삶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던 모세는 또 어땠을까? 명색이 지도자의 길을 걸었던 엘리트교육의 사람인데, 그동안 배운 이력을 가지고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무려 40년의 광야 생활을 그렇듯 허송세월 보내듯 일상에 젖어 살았어야 했을까? 훗날에 보나 아, 앞으로 있을 40년의 사역에 대한 대비였구나 하는 것을 누가 알았겠나?

 

늘 목숨을 담보로 쫓겨다니던 다윗의 생은 또 어떻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40:8).” 나는 누구의 사역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처지가 못 된다. 뭔가 성공적인, 그래서 모범이 될 만한 목회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만날 그 타령이라. 오히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워하며, 어제 같이 편하고(?) 느긋한 날에 뭐가 불안해서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안정제를 먹어가며 버텨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내가 가진 한 가지 확신은 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143:10).” 주가 함께 행하시고 주가 인도하신다. 가시적인 성과는커녕 있던 애들도 다 떨어져나가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아이 하나가 유일한 성도이면서 교회 일의 전부인 주제에도 나는 이 일이 하나님의 일, 맡은 바 주의 사역이라는 데 더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저 식구들끼리 꾸려가며 아무 것도 나아질 게 없는 것 같은 교회이나 여기에 교회를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시고 주의 피값으로 사신 것임을 나는 이제 회의하거나 갈등하지 않는다. 하물며 내 몸 하나 말씀으로 바르게 건사하는 일이 내 사역의 전부라 해도.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5:17).” 더는 갈등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 모든 게 주의 뜻이라. 주가 이루시고 이끄시고 이리 두시는 것이라. 교회란 그러므로 주를 모시고 사는 나 자신이고, 내 곁에 두신 가정이며 가족 공동체이고 나아가 하나뿐인 성도가 전부라 해도 그것이 교회이다. 나는 저에게 그리 설명해주고 싶었고, 전에는 그러는 게 변명같이 부끄러웠으나 이제는 마땅하였다. 왜냐하면 내게는 다른 길이 없다. 이 길이 아니면 기어이 하나님이 막으시고 다른 길을 여실 것이다. 하나님이 가로막지도 않으시는데 내가 주저하면서 주의 뜻을 운운하고 어떤 마음을 바라는 일은,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그러니 하나님만 보고 간다는 일은 단순해지는 일이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가늠하지도 않는다. 속된 말로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다만 이 모든 상황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 나도 내 것이 아니라는 바울 사도의 고백은 그래서 명징하다. ‘사나 죽으나 나는 이제 주의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어떤 목회를 하느냐, 하는 따위로 고민할 게 없다.

 

여기가 거기다. 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이 하나가 지금 내게 맡기신 사역의 전부다. 그럼 어떤가? 수백 명의 성도가 없는 교회라, 뭔가 구색이 갖춰지지 않은 교회라, 이건 아닌데 싶은 나의 마음이 마치 주의 마음인 것 같아서? 그것도 다 주가 하실 일이지 내가 어찌 바꾸고 일구어 나의 공로로 감당해야 하는 사역이 아니다. 차라리 교회 일(?)을 떠나보면 어떻겠나? 그렇다고 주를 믿지 않을 것도 아니고, 사역이 꼭 교회 일인가? 사는 게 사역이라! 이 목숨 하나를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며, 이 몸뚱이를 가지고 또 하루를 씨름하는 일이 그 자체로 사역이며, 내 곁에 두신 저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일이나 하찮고 보잘것없는, 성취감도 없는 일이 곧 사역이다. 지긋지긋하고 넌더리가 나는 일상이 곧 사역이다. 이는 모두 주와 세상을 화목하게 하시려는 일이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 다만 우리는 즐거워할 따름이다. 날마다 해가 쨍쨍한 날에 홍수 심판을 두려워하며 무한정 방주를 짓는 무모함이 어찌 즐거울 수 있을까?

 

그것은 곧 비가 오고 안 오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가 두신 일이라. 오늘이라 일컫는 사명이었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이것이 오늘 하루 더,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이 땅에 연장하시는 이유이고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4:11).” 다만 우리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삶이었으니,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35:3-4).” 오늘 말씀은 심신이 불안으로 늘 긴장하고 살면서도 묵묵히 주를 바라는 데 푯대를 세우신다. 때론 어렵고 힘들어 이 길이 맞나?’ 하고 또 회의가 들 때도,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5: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