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18: 1-3 /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전봉석 2020. 5. 29. 11:11

20200531 주일

 

시편 18: 1-3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8: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18: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들어가는 말

시어(詩語)는 제한되지 않는다. 문자적일 수 없다. 문자적이란 사전적의미의 제한을 받아 뜻은 명료하나 해석은 확장될 수 없다. 왜 하나님은 모호한 언어, 은유의 말씀으로 임재하실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육신이 되었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의미는 무얼까? 은유는 해석과 의미가 분분하고 저마다의 의견을 확장하여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게 한다.

 

성경을 읽는다먹는다는 동사는 일치한다. 묵상은 씹어 삼켜 소화시키는 일이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10:10).” 그런데 우리는 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 된다. 죄악 중에 잉태되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 이를 순순히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좀 더 솔직히, 성경은 늘 현실적이지 못하다. 오늘 말씀은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18:2).” 여기서 반석, 요새, 건지시는 이, 바위, 방패와 같은 명사는 구원의 뿔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에서 확산하여 나의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한다.

 

성경은 성경으로 이어져,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귀결된다. 또한 우리의 삶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7:24).” 그 집반석위에 지어져, 우리의 요새가 되고 저는 우리를 죄악 중에서 건지시는 이시다. 곧 우리가 피할 바위시다. 우리를 막아주는 방패시다.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구원의 뿔이면서 우리의 영원한 거처 산성이시다. 말씀은 이와 같이 이다’, ‘아니다로 한정되지 않는다. 이를 문자적으로 가져오면 수학적인 의미로 국한되어 이다이거나 아니다로 명백해진다. 하지만 성경은 이다아니다를 모두 포함한다. 가령 하나님의 반대는 악인가? 하나님은 대적은 마귀인가? ‘이다아니다는 우리의 답을 국한지어 멈추게 한다. 하지만 말씀은 선과 악의 구분을 초월한다. 말씀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읽고, 먹고, 소화하여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일상의 주로 살아야 한다.

 

본문 이해

오늘 시는 총 50구절로 된 꽤 긴 시편으로, 이를 6연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먼저 정리해보았다.

 

1(1-3)의 주제는, 내가 주를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주는 나를 원수에게서 구하신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3).” 곧 저는 나의 힘이시다. 그 하나님을 내가 사랑한다.’ 그 하나님의 특징은 앞서 언급했듯이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피할 바위시다.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시다. 나의 원수는, 조급함이고 자만함이며, 이루고자 하는 생의 목표이고, 남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2(4-6)의 주제는, 우리는 환난 중에 주께 부르짖는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6).” 고통 없이 사는 인생은 없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할 때, ‘스올의 줄이 우리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나를 옭아맬 때, 환난 중에서우리는 주께 아뢴다. 우리의 특권이다.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는 권리다. 그러면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신다. 우리는 그렇게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을 다한다. 이는 우리의 권리이면서 의무다. 반드시 그의 귀에 들린다는 확신이다.

 

3(7-19)의 주제는,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를 도우신다.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16).” 곧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이시다. ‘이에 땅이 진동한다. ‘산들의 터도 요동한다. ‘그의 진노는 가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죄악 된 사람보다 자연이 더 잘 안다(8-13). 하나님은 악을 흩으신다.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난다(15). 주께서 손을 펴사 우리를 붙잡으시고 건지신다(16). 어떤 원수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아무리 재앙의 날이라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가 되신다(18).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19).”

 

4(20-28), 우리가 행할 본분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27).” 돈 없고, 힘 없고, 빽 없으면 하등에 쓸모없는 취급당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아등바등 사는가. 그럴 때 주님은 우리의 상한 심령을 귀히 여기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하나님이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는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실 것이다(18:20). 내 손이 깨끗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씻기기 때문이다.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없다. 신앙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사는 일이다. 주가 완전하심으로 우리도 완전하기 때문이다.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우리는 그래서 말씀으로 교만하지 않는다(26-27). 등불을 켜심으로 우리를 밝히신다.

 

5(29-40)의 주제는, 우리는 주를 의뢰한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36).” 곧 우리의 노력 여부에 따라 성공이 오는 게 아니다. 주께서 우리의 걸음을 넓히심으로 우리가 넘어지지 않는다. 출세와 성공은 이 땅의 기준이다. 더 넓은 보폭을 알 수 없는 달팽이에게는 한나절의 서너 폭 마당이 위대할 따름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의 강함은 주를 의뢰함에서 온다. 굴하지 않고 달려갈 힘이 그것이다. 주를 의지함으로 담을 뛰어넘는다. 말씀은 완전하고 순전하시다. 날마다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신다(30). 아무리 환경이 어떠하다 해도, 우리의 발은 암사슴처럼 가볍다. 주께서 높이 뛰게 하신다(33).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34). 이는 주의 온유하심으로 나를 크게 하신다(35). 그리하여 우리의 걸음을 넓혀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 우리의 원수를 쫓으신다. 저들이 우리 발아래에 엎드러질 것이다(38). 그 어떤 전쟁에서도 주의 능력으로우리를 띠 띠우신다.’ 나를 미워하는 것들로부터 끊어버리신다.

 

6(41-50)의 주제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47).” 우리는 지난 주일에도 같이 말씀을 나눴듯이 세상도 하나님을 찾는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들이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 저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그들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신다(41).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상적인(?) 교회들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곧 다루겠지만 마술사 시몬의 믿음 같다. 그러할 때 주께서 나를그와 같은 다툼에서 건지신다.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신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는 데에 같이 휩쓸리지 않게 하신다. 결국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46).” 우리들은 안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하실 것이다.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신다. “주께서 나를 대적하는 자들의 위에높이실 것이다.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건지신다.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할 수 있다(49). 우리는 기름부음 받은 자요, 왕 같은 제사장이다. 다윗의 후손이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50).”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8:1).”

 

사랑한다는 것은 말로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생각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는 우리의 의지를 능가하고 우리의 판단과 이성을 초월한다. 현실적으로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랑은 없다. 대표적으로 부모의 사랑은 훨씬 이해 너머의 영역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은,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7:8).” 우리를 어떻게 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던가? 그래서 이제 더는 종 노릇하지 않는, 이 값은 얼마나 엄청난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 곧 오늘 우리의 믿음은 주의 십자가의 값이다. 값없이 주신 은혜요, 선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우리의 수고로 얻은 것이 아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31:16).”

 

이에 우리는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17:19).” 말씀을 상고하고 묵상하는 일이 그래서 우리의 일상이다. 아무리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사랑은 그와 같은 실제다. 주신 삶을 사는 일이다. 삶은 실재다. 오늘 여기에서, 내일 저 천국에서, 우리는 주를 사랑하고 주를 찬양하며 산다.

 

그런데 마술사 시몬같은 신앙인들이 늘 있다.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8:9-10).” 저는 자신의 수고와 열심으로 주의 권능을 바라였다. 저의 열심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부추긴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한다. 열심을 다해 신앙의 척도로 삼는다. 그러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하시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할 줄 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2-23).” 다들 참 열심히 산다!

 

나오는 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17:9).”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 하는, 주를 신뢰하고 고백하는 것이 가장 귀하고 값지다. 그것으로 영생을 준비하는 것이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4:4).”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참으로 기이하다. 가령 철학과 이성의 대륙 유럽으로 복음이 들어갈 때도 난다 긴다 하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 철학자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실제 별로 관심도 못 받는 작은 어촌 마을에서 그것도 소외되었던 여성 몇을 중심으로 처음 시작되었다(16:11-14). ‘문 밖 강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처음으로 복음이 증거되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여자의 몸을 빌어,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몇몇을 통해 구원의 놀라운 복음이 시작되었다. 곧 오늘 우리들을 통하여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고전 1:26-29)” 그러므로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