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전봉석 2020. 5. 30. 06:56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이사야 36:6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6:9

 

 

가끔은 정상인 듯 아이를 대한다. 뭐라 꾸짖고 야단을 치다, 돌이켜 얼른 말을 바꾸고 기분을 맞춰준다. 그래놓고는 괜히 속상해서 아이가 돌아가고 나 혼자 우울해지기도 한다. 한 영혼을 위한다는 일, 그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전부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어느 것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까지도, 저의 살아온 날과 살아가야 하는 날의 무게는 가늠할 길이 없어 눌린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주를 송축해야 하는 이유를 되새기게 되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16:31).” 주께서 나를 돌이키심으로 나 하나의 변화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는 일이다. 그것뿐인가? 나는 지쳐 쓰러질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그의 쉼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다. 수시로 애굽을 의지하던 삶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런 나를 용서하시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이에 사명이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오늘 이사야서는 나의 어리석었던 날들을 돌아보게 한다.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36:6).” 사람을 그리도 찾고 의지하며 어떤 이의 말에 위로를 받으려 하였던 삶인데, 그럴 때마다 되레 손이 찔렸다. 저들은 상한 갈대. 지팡이로 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했던 내 안에 주를 앙망하는 마음을 주셨으니,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45:2).” 다른 이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아이로 인한 내 안의 속상함이 오히려 주를 바라며 의뢰하게 한다. 주가 아니시면 저를 위하거나 사랑할 수도 없다.

 

이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상상 그 이상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시니 앞의 믿음은 그럴 것이다, 하는 막연한 기대와 소망이었다면 뒤에 믿음은 확신과 내 삶의 증거다. 나를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 나 같은 것을 어찌 돌이켜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고 계신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의는 내가 임의로 결단하고 결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바울의 고백이 단지 저의 것이 아니었음을 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가만히 주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심지어는 내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 나의 마음조차도 부끄럽고 송구하고 염치가 없다. 아이를 뭐라 나무라다 저 아이를 오늘 내게 두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

 

아이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돌아보는 것은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추억에 젖는 따위의 감상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는가. 하나님이 어찌 감당하셨는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니, 아픈 아이라. 그저 속상하고 답답해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안에 이는 여러 갈등과 회의가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날들이다. 아들은 성실하게 공부에 전념하고 딸애는 늘 희생적이다. 아내는 사랑이 많으며, 나는 평안하다. 그럼에도 어떤 불안,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엄습하고 휘어잡는 감정으로 나는 속수무책이라. 약이 늘었다가 줄었다가 어디서는 괜찮다가 어디서는 불안이 밀려오고, 갈팡질팡 나의 감정은 소동하는데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8:10).” 저 어린 소자 하나에게 하는 것이 또한 주께 하는 일이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나의 보람이나 어떤 가치, 누구에 대한 어떤 희생이나 나름의 만족으로가 아니다. 주께서 주시는 물이다.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려고 많은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 방도를 찾고 그리 행하며 사는가. 누구는 요가를 하며 명상에 잠기고, 누구는 산 속 깊은 녹음을 찾아 심신의 안정을 취하며, 누구는 이를 상징하듯 몸에 문신을 하고 기호를 삼아 그것에 입 맞추며마술사 시몬과 같은 믿음의 열심이 오히려 저의 영혼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도는 따로 있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1:14).” 주의 천사가 나를 호위한다. 날마다 매순간 보호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예수님은 단언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신다. 이를 믿고 의뢰할 때 안정제를 더 먹고 덜 먹고, 무슨 일이 잘 되고 안 되고, 생각 같지 않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나는 모두에게 들려줄 수 없다. 저들을 설득할 수 없다. 아이 형의 굳은 마음을 내가 돌이켜 세울 수 없고, 그 엄마의 지친 마음을 내가 굳건하게 채워줄 수 없다. 그리 애쓴다 한들 내가 다룰 수 있는 영역 그 이상의 문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 뭐라 하기에 앞서 날마다 안타까움으로 오직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으로 마주하고 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아니면 내가 더 지치는 일이라, 그래놓고는 속상해서 종일 우울하였는데 그러는 마음까지도 주께서 더하시는 것이라. 나는 그리 짐작하고 해야 하는 일을 감당할 뿐이다. 전에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할 수 있는 걸 해!’ 하고 말하면 이 말은 공수표 같은 것이다.

 

돌아보면 할 수 있는 것이란 그저 자신을 의지하거나 상한 갈대인 애굽을 의지하는 일이었으니, 그럴 때면 손바닥만 찔리고는 하였다. 우리가 감히 볼 수 없고 상상도 못할 그 이상의 일을 이뤄 가시는 하나님이시라,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당장 그 다음 이야기는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오직 성령으로 이것을 보이심이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그러니 아이 하나를 대하는 일에서도 나는 놀라운 주의 섭리를 묵상한다. 내 안에 이는 여러 갈등과 변화를 통해서도 주의 간섭과 주도하심을 목격한다. 그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20:8-9).”

 

내가 꿈꾸는 그것이 아니라 주가 바라시는 그것을 꿈꾸게 하신다. 소망을 두게 하심으로 믿음을 부으신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아무리 내가 선을 도모하고 의로운 말로, 행실로 사람을 도우려고 한다 해도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3:12-15).” 그것이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번번이 내 안에 이는 불안과 두려움이 깨닫게 한다. 우리에게 보내시는 아픈 아이들을 통해 알게 하신다. 참으로 온전한 가정이 없다. 상하지 않은 영혼이 없다. 두 아이가 다음 주 월요일부터 새로 온다는데, 아내는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앞서 남매가 둘 다 지진아요, 둘째 녀석은 분노조절장애가 있고 말 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데그들 소개로 두 아이가 더 온다니. 나는 주님의 의도를 생각하다보면 불안이 먼저 엄습하곤 한다. 그럴 수 없는 일인데 우리가 어찌 하려고 하는 마음이 늘 지배하기 때문이다. ,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6:9).” 달리 더 나은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오직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