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전봉석 2020. 5. 31. 06:36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이사야 37:32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편 7:10

 

 

주어진 삶에서 묵묵히 주신 바 그 일상을 준행하는 것이 복되다. 참된 신앙이란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남의 시선에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이는 여호와의 열심을 아는 까닭이다. 그가 이루시는 세계다. 그래서 더욱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 하는 기도가 드려지는 것이다. 어떠하든 나의 수고와 애씀은 악하다. 무엇으로도 선을 이룰 수 없다. 다만 주를 바라고 신뢰하는 일, 오늘 날 이 땅의 모든 현상을 살피면 불의에 매인 바 된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8:23).” 이는 비단 시몬에게만 해당되는 지적이겠나? 내 안에는 그런 속성이 여전하지 않던가? 안이하고 무능하며 회피하고 미적거리는 마음은 온통 궤사한 자의 길에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13:2).”

 

나에게 유익은 그러므로 규칙적인 생활이다. 상태가 어떻든지, 지금 형편이 어떠하든지 늘 주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말씀에부터 앉는다. 아침에 먼저 주를 바란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143:8).” 이처럼 묵상을 글로 쓰는 일은 다음으로 유익하다. 아침을 연장한다. 일찍 교회로 나아가 나는 아침에 쓴 묵상 글을 읽고 수정하며, 커피를 마시고 조용한 하루를 시작한다. 병적으로 시간을 지키려는 것은 아닌데 그러다보면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행함으로 관상수도사같이 일상은 단조롭다. 아이가 오지 않는 주말의 아침은 헐렁하였다. 여느 날보다 긴장도 덜하다. 새로 구입한 C. S. 루이스의 <오독>(홍성사)을 읽거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기독교 시리즈 여섯권째인 <저항할 수 없는 기독교>를 읽는다. 이를 나는 스스로 영적 독서라 부른다. 소설가 강영*이 새로 낸 책을 등기로 보내왔다. 읽고 뭐라 리뷰를 적어주면 좋은데, 앞에 영적을 붙이는 까닭은 책은 읽는 일조차 사역’의 연속이다. 누구와의 통화 뒤에 나는 나름 사역에 대해 그리 정의를 내렸다.

 

사역은 사역자만이 따로 걷는 길이 아니었다. 존 번연의 기독도가 걸어갔던 것처럼 모든 성도들이면 누구나 나아가는 길 위의 사역이다. 우리는 저마다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개개인의 사정이나 형편이 또는 넘어지고 좌절하고 자빠지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하루의 나날이라 해도, 같은 하루를 살지만 영적인 하루’는 날마다 새롭다. 살고 사는 세상은 자연적인 하루. 뭔가 뜬구름을 잡듯 막연하고 고상한 일이 영성이나 영적인 게 아니다. 망령된 자의 길을 가지 않는 것, 자연적인 하루에서 영적인 하루를 사는 일, 몸이 원하고 사회가 바라고 남들이 다 그러고 사는 일에서 하나님의 열심을 연속하며 영적인 하루로 사는 일, 이 모든 게 말씀 안에서였다. 하나님과 함께였다. 저들을 일컬어서는 망령된 자라 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12:16).” 즉 축복의 명분과 그 축복권에 대한 의의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삶이 자연적인 삶이다. 하나님의 열심과 무관한 데서 사는 삶으로 자신의 꿈과 이상과 낭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역-주의 일을 바라는 자는 더디고 무디고 헐겁고 싱거운 듯하나 결코 혼자 가는 길이 아니었다.

 

요즘 부쩍 그런 마음을 주신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은 자신의 무능함을 돌아보고 주께 아뢰고 의탁하며 회개하는 날들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또 똑같이 하나님의 열심을 외면하는가? 오늘도 우리의 하루가 귀한 까닭은 그래서 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17).” 회개하지 않는 영혼에는 하나님도 어찌하실 수 없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때리고 야단쳐도, 별 수 없는 영혼에 대하여는 하나님은 내버려두신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19).” 저들이 몰라서가 아니다. 가령 누가 다녀갔고 그 뒤로 나는 아침마다 묵상을 하면 글을 보내고 성경 말씀도 한 구절씩 같이 보낸다. 그때마다 저는 감사합니다.’ 하는 답례를 한다. 그러면서도 결코 교회로 가지는 않는 것 같다. 여전히 뭉그적거린다. 가슴이 조이고 허리 디스크가 터져 죽을 것 같은 공포에서 주를 찾은 것 같은데, 살만해져서 그런가!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 뒤로 번번이 숨는다.

 

어쩌겠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나는 그 길로 가봐서 안다. 또는 그리로 나간 이를 기다리며 집을 지키다 돌이켜 돌아온 이를 반가워 할 수 없었던 (서운함과 앙갚음으로), 두 아들의 사례를 동시에 겪어봐서 안다. 싫은 데는 별 수 없다. 글방은 좋은데 교회로는 싫다. 글방 선생으로는 편한데 종교인(?) 목사로는 부담스럽다. 대놓고 그리 거리를 두고 격식을 가르는 이에게 나는 이제 단호하여진다. 하나님이 싫으면 나도 싫다. 하나님을 빼고 우리끼리는 원하지 않는다. 솔직히 그만큼 저를 사랑하지도, 사랑할 자신도 없다. 오히려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다. 내가 경계하는 부류다. 그럼에도 저들을 마주하고 위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우리가 함께 주 안에서다. 나는 아이에게도 누누이 이를 설명하였고 양해를 구한 바 있다. 그런데 엄마 핑계를 대고 교회는 가지 말고 글방은 가라고 했다는 말에 두 손을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종종 그렇게 위하고 대하는 이들을 안다. 나는 더 다가가기를 꺼려한다. 우리의 대화는 대부분이 일상적인 이야기인데 전부가 하나님이 없는 화두다. 영적인 말로 하면서도 금세 입을 다물거나 어색해져 다른 말을 이어간다. 그럴 때면 내 안에 계신 주의 영은 요구하신다. 우리 대화에 관여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때에 누구는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고 돌이켰고,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22:61-62).” 누구는 자신의 실망과 실의와 신념에 붙들려 목을 맸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27:5).” 시작은 별 거 아닌 것 같으나 결과는 끔찍하다. 여전히 그러할 때 우리의 막연함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치닫고는 있었다.

 

결론은 그렇다면 하나님께 죄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죄는 우리 스스로 정의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1:13).” 곧 하나님은 사람 앞에 옳다 보이는 것을 선하다고 여기지 않으신다. 사람에게 인정 받으면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다. 이는 성경의 원리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6:15).”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은혜였다.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의 인정과 존중을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성경은 엄연히 경고하였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18:4).” 곧 우리의 범죄란 자신이 신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의 기준으로 자신을 삼는 일이다. 이와 같은 복음을 부끄러워한다.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니 교회는 싫은데 글방은 필요하니까, 선생으로는 의지하고 싶은데 목사로는 부담스운 것이었으니. 나는 어느 아이의 엄마 말이 진짜인지, 혹은 아이가 지어낸 교묘한 거짓말인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18-19).” 누구는 몰라도 자신은 안다. 우리는 누구도 자신이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29).” 오직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세상살이가 아니라 영혼의 일이다. ‘영적인 삶이다. 하나님의 열심은 오늘도 그리 일하신다. 그리하여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사 37:32).” ,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7:10).” 매일 아침, 시편은 나에게 기도의 중심을 잃지 않게 하시는 것 같다. 그러므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1).” 그러할 때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12).” 그러나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