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이사야 38:19-20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죽었다 살아나는 오늘 히스기야의 진술에서 몇 가지 주목하게 한다. 먼저는 주의 신실하심을 감사하고 이를 자녀들에게 알린다. 곧 증인이 되는 삶으로 남은 생을 새롭게 갖춘다.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그리고 저의 감사는 찬송하는 삶으로 이어진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 이치를 온전히 깨닫는 자의 노래다(사 38:19-20). 이를 이어서 시편의 말씀을 읽어보면, 우리가 주의 오묘한 창조 세계에 놀라워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그 가운데 사람으로 사는 일이 얼마나 큰 은택인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나 같은 게 뭐라고, 주께서 이처럼 돌보시고 위하시고 함께 하시는가 하는 것이다(시 8:3-4).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주가 갚아주시는 삶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떤 서러움인지, 억울함인지, 안타까움인지, 답답함인지… 자의로든 타의로든 형성된 나의 은밀한, 골방에서 주를 마주한다. 나름 주 앞에 성의껏 살다 중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히스기야의 경우처럼,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이 원리를 바로 안다면 현실의 세계에서도 영성의 세계로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뜻으로 우리에게는 이미 천국이 그 마음에 임하였다.
지혜자는 이를 즐거움으로 인식하였고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잠 12:25).” 여기서 선한 말을 나는 기도로 읽는다. 주께 아뢰는 은밀한 중의 말이다. 그러할 때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20:5).” 고로 누구는 같은 근심에서도 천국을 살고 누구는 날마다 지옥이다. 주어진 날에 주께 아뢰는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기쁘심이다. 다들 사람(자신)에게 보이려고 자기 위안의 정도로 삼는 것이겠으나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이미 내가 구하기도 전에 주께서 다 아신다는 이 놀라운 세계가 곧 이 땅에서의 천국이 아닐까? 세상은 공평하여서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함으로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곧 주의 날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으나 주어진 날에 충성을 다하는 자는 주를 기쁘시게 한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나는 이 말씀을 목사 안수를 앞두고 어느 예배 중에 설교로 들었다. 앞서 나이든 목사는 이와 같은 말씀을 앞으로의 목사들 앞에게 당부하였다. 그때는 차마 가늠할 길 없던 이 길의 깊음을 이제는 조금 느낀다.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이러려고 목사가 됐나? 하는 회의가 일 때, 사람에게 또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 당황할 때 나는 비로소 이 말씀을 되새기고는 한다.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목회라니. 나는 아픈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말씀을 전한다. 저의 육신은 정해진 병명 그 이상의 골방에 갇혔으나 그 심령에 주의 영은 나와 시선을 맞추신다. 이래저래 잘나고 나름 독자적인 판단을 하는 ‘온전한’ 아이들은 다들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였는데, 저는 주신 바 그 자리에 충성하는 자였다.
약기운에 다시 잠들었다가 늦잠을 자게 되었다면서도 헐레벌떡 서둘러 주일 예배에 나오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저 아이의 대표기도로 나는 더욱 주를 바랐다. 아이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문맥이 안 맞고 맥락이 닿지 않아 말은 무슨 소린지 그 뜻을 허공으로 흩어버리는 것 같으나 그래서 더욱 신중하게 듣다 이내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할 때의 안도와 화답할 때의 기쁨이라니!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이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겔 3:24).” 우리 삶의 앉고 일어섬에서, 닫고 여는 하루하루의 날들 중에서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나는 저 아이를 보면서 그 속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을 여실히 느낄 때 이 오묘한 진리를 되새기곤 한다. 그러므로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삼하 22:30).”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란 때로 말도 안 되는 저의 기도에서 ‘아멘’으로 다 같이 화답하는 일과 같다.
아이의 기도는 그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잘 빠지고 미끈한 어휘보다 주의를 끈다. 내 안에 이는 안타까움이나 안쓰러움으로 다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미간을 모으고 조마조마하며 맥락이 닿지 않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난간을 가늠하며, 나는 늘 ‘주님’ 하고 곁에 계신 주님을 부르게 된다. 그러할 때 다윗의 기도는 나의 것이 된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 18:29).” 회피하고 뭉그적대는 사명은 엄연히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먼저는 주를 의뢰함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적진을 향해 달린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나는 다만 여기에서 주를 바란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달려 나간다. 말도 안 되는 성벽, 가로놓인 담을 뛰어넘는다. 지능이 떨어진다 하고, 자기 세계에 갇혔다 하고, 양극성장애가 있다 하지만, 그리하여 저 아이보다 온전하다고 좀 나으신가? 쓸모없는 나무가 산을 지키는 법이다. 저 아이가 지키는 자리, 내가 오늘 준행하는 보잘것없는 이 자리, 이 귀하고 복된 주의 은총을 깨닫는다.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18:35-36).” 어제 주일에 우리가 같이 나눈 말씀이 곧 나의 고백이 되는 삶이었다. 나의 걸음을 주가 넓히신다. 자의적으로 교회를 확장하고, 사람을 모으는 수고와 헌신도 중요하겠으나 주시는 바 한 날의 삶에서 그 일상을 묵묵히 준행하는 삶이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 다들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고 외면하며 한사코 마다하는 그 자리, 이 걸음에서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59:9).” 그리하여 나는 더는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삼상 2:3).”
내가 어찌 하려는,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나름의 모색과 더 나은 궁리에서 벗어난다. 그저 묵묵히!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주의 뜻을 따라! 주의 날로 살아가는, 현세에서 누리는 천국이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 임하셨다는 말씀을 나는 그리 되새김질한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7:24).” 고로 내 속에 두시는 주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이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늘 나의 가운데 거하시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부디 나의 남은 생은 그것으로 이미 그러하기를. 그러할 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 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