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전봉석 2020. 6. 10. 06:05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이사야 47:10-11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15

 

 

저마다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그 말할 수 없는 환난 날에염려 없이 근심하지 않고 지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20:1-3).”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며 알았다. 그렇지 않을 때에 누가 관심이나 기울였었나? 어려움이 나를 짓누르면서야 주를 부르고 주의 이름을 찾으며 주께 도움을 구하는 일이었으니.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17:6).” 오늘 시인은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7).”

 

아이엄마 학교 아이 중에 누가 확진자가 나왔고 학교는 임시 휴교를 하고 교직원, 학생들 모두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혹시 몰라 이이는 글방에 오지 못했고 당분간 서로 자중할 것을 당부하였다. 우리 동네 인근에서 확진자들이 속출하여 불안은 가중되었고, 나는 혈압이 높아 병원을 찾았다. 누구는 처음으로 정신과에서 받아온 약이 맞지 않아 이틀째 울렁거리고 몽롱하였고 그로 인한 불안이 가중되어 힘들어했다. 참 희한한 건 또 누구 이야기다. 저는 수십억의 자산이 있고 상가 다섯 채에 아파트 세 채를 보유한 이혼녀다. 그나마 외국에 있을 때는 한인교회라도 다녔는데 코로나로 한국에 들어와서는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저가 곧 빛 좋은 개살구라, 친구도 없고 실은 눈만 뜨면 받을 월세에서 이자에 원금을 갚고 어느 은행에 얼마, 뭐가 얼마 돈돈거리며 돈을 굴리며 외뢰워 한다. ‘절친이라며 누굴 찾아와 할 말 못할 말 다하면서 정작 돈에 있어서는 있는 것들이 더한다고 밥 한 끼를 사지 않는다. 왜 그러고 사나 서로가 의아한데, 돈이 많으면 뭐하고 학벌과 직업이 좋으니 또 뭐하겠나?

 

이 세상은 참 요지경이라 스스로 불안과 느슨함의 경계를 오가며 즐거움을 추구한다. 무서운 영화를 찾아보고 스릴 있는 놀이동산을 못 가 안달이다. 어느 등반가가 말하길 내가 살아서 내려가면 다시는 산에 오르지 않을 거야! 하는 후회와 맹세하는 순간 없이 등반하면 재미는 없다.’ 이 무슨 기괴한 궤변인지. 아슬아슬한 승부를 즐기며 끝까지 가 보는 놀이에 함몰된 세상이다. 실제 아이들은 숨 참기놀이를 하고 목 조르기게임을 하곤 한다. 또한 대리만족을 교묘하게 상품화하여 드라마도 막장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잔인하고 기묘한 전쟁 영화가 흥행을 거둔다. 다들 외눈박이 거인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이를 오늘 이사야는 바벨론과 갈대아를 일컬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47:10-11).”

 

나는 일련의 사태를 보고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경우를 살피면서 환난 날에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뜻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감사한 일인가를 되새길 수 있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곧 우리의 날들은 하나님의 의가 되기까지 이어진다. 누가 모처럼 연락을 하여 직장을 좀 쉬고 건강을 돌보며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며 지낸다고 하였다. 담임 목사는 저에게 주일학교 교사를 권했는데 저는 정중히 거절하였다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나는 할 수 있으면 하라 일렀고 그 기회가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말해주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44:22).”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돌아보면 나는 송구하고 면구스러우나 오늘에 목사로 사는 일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것으로 나는 말씀을 준비하고 누구와 이야기를 한다.

 

저마다의 사연이 다들 구구하여서 종종 우리는 잊고 잊히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가 싶을 때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잊어주신다고 해서 우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시 그 죄를 되풀이 하며 살 수는 없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7:19).” 누구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고착된 마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그래서 뭔가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온갖 애를 쓰듯 신앙생활을 하려니까 믿음이 여간 피곤하지가 않다. 저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마치 긴장관계 같다. 초조하고 불안해한다. , 우리 죄를 그처럼 말갛게 잊어주시는 하나님의 아량 앞에서 우리는 대체 무슨 수로 그 은혜를 갚겠다고 저토록 열심인지! 그러니 또 누구의 열심은 결국 교회를 비난하며 떠났다. 저가 용납할 수 없는(?) 종교화합과 이단적인 요소의 일에 교회가 묵인하였다는 이유라는데, 듣다 보면 자기모순에 빠진 자기논리에 지나지 않는 소리다. 그냥 진리가 싫은 것이다. 그런 이가 진리를 찾아 용쓰는 걸 보면 나는 늘 그런 사람이 더 무섭다.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42:10).” 주가 더하신 이 땅, 나는 오늘 나의 일상을 주가 허락하신 땅으로 읽는다. '온유한 자가 받은 기업의 땅'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 종종 주어진 현실을 외면하고 일상을 벗어나 뭔가 그럴듯한 천국만을 기대하며 사는 것인지. 신기루 같은, ‘사역다운또는 하나님의 일다운 일을 운운하며 저 하고 싶어 일을 찾는 것이니! 그럼 지금, 여기는? 오늘 이 한 날의 수고는? 그저 아무 것도 아닌 허상 뿐인가? 나는 저의 열심을 그야말로 현실도피로 여겨질 따름이다. 주의 일, 사역을 운운하며 찾아다니지만 실은, 선을 찾는 늑대랄까. 나는 그와 같은 이를 종종 본다. 저들의 열심은 대단하긴 하다. 또한 그것으로 부흥(?)을 이루긷고 한다. 하지만 왠지 자꾸 오늘의 마술사 시몬같아서, 나는.

 

스스로 성령의 능력을 자기 수고의 값을 주고 사려는 듯 하는 그 열심으로 학위를 따고, 어디서 무슨 일에 죽기살기로 덤벼드는 이들이 나는 두렵고 안타깝다또 너희가 말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양식의 궁핍도 당하지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리라 하면 잘못되리라(42:14).” 성경에도 보면 애굽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내 인생을 돌아봐도 내 곁에 늘 바로가 왕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언제든 나를 도와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누구의 열심과 누구의 안일함이 스스로들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경쟁을 벌이는 것 같아서, 나는. 더 무서운 것은 저들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들이 찾아 듣고 있는 유튜브가 훨씬 더 진리이고, 그와 같이 동조하는 무리가 훨씬 가까운 이웃 같고, 자신의 완고함이나 옹고집이 절대적인 확신과 신념이 되어버린 것이어서. 나는 종종 저들 말은 듣다보면 내가 면구스러워서 할 말을 잃고 지친다. , 그렇구나! 하고 말아야 한다. 논쟁을 벌였다간 졸지에 원수지간이 된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5:11-12).” 더 말해 소용없는 일에 대하여는 입을 다물자. 주가 다루실 것이다. 부디 나의 소원은 저가 나처럼 미련하여 먼 길을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고 기도할 따름이다. 그러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나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더는 말해 소용없을 때면 하나님도 내버려두신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1-23).” 이 얼마나 두려운 메시지인가! 돈이 수억이면 뭐하겠나? 그 외로움으로 눈만 뜨면 들어올 돈과 나갈 돈을 계산하느라 여념이 없다. 좋은 차, 좋은 집에 살면 뭐하겠나? 눈만 뜨면 핸드폰 화면에 주식시장을 띄워 얼마나 올랐는지, 어디서 매도하고 언제 갈아타야 하는지, 온통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인 것을. 답답하여 뭐라 한 마디라도 거들면 교회 나가면 좀 낫냐?’ 하는 소리나 하고

 

그처럼 죄가 우리의 얼굴을 가리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59:2).” 그러니 참 답답한 노릇이다. 의사로 살며 알코올 중독성 치매가 오고, 돈돈거리며 아내도 버리고 자식들도 모두 등 돌리고, 젊을 때나 예쁜 여자를 찾지 그처럼 건강을 자부하다 어느 순간 불안과 초조에 잠식당해 메마른 정신으로 살면서도.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3).” 이를 알면서도 굳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요즘 나의 불안으로 더욱 주를 바란다. 육신의 연약함과 마음의 번민으로 주만 의지한다.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나 말씀을 앞에 놓고 앉는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7:15).”

 

나의 의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의로우신 이 앞에서의 의다.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1).” 오늘 시인의 기도를 오물거리듯 읊조린다. 저마다 나름의 가치와 기준으로 산다면 나는 주께 의지함이라.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2).”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6).” 왜냐하면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7).” 나는 그 사랑을 안다. 일상이 그 흔적이다. 그 자체다. 아니면 나 같은 것이 무슨 면목으로 말씀을 전하는 자로 목사로 누구의 말을 듣고 종일토록 말씀을 묵상할 수 있을까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