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이사야 51:7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편 21:5-6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으나 코로나 사태로 인해 우리의 관계는 뒤죽박죽되었다. 생활 반경이 달라지고 서로의 거리두기는 안전을 도모하는 길이면서도 더는 가까이 할 수 없는 경계가 되어지고 있다. ‘엄마가 그러는 게 좋겠대요.’ 하고 아이는 오늘 주일예배에 못 오고 다음 한 주간도 글방에 오는 것을 미루겠다고 하였다. 엄마의 초등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왔고 모두가 음성이라 판정을 받았으나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조심하는 게 낫다는 거였다. 나 또한 그러는 게 나은 것인지, 그냥 오라고 하는 게 나은 것인지. 이와 같이 애매한 상황이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어디에 의지하는가? 오늘 말씀은 우리를 불러 세우신다. 그리고 물으신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막연하고 애매한가. 그러니 가시적인 무엇을 추구하고 이를 좇는 것이겠으나.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7).”
애매한 갈등은 죄의식 같기도 하고 조급함 같기도 하여서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이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저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갈팡질팡 온 나라가 혼란스럽고 전 세계가 균열을 보이고 있다. 나 하나 바로 서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러니 모두 등지고 안전을 도모하겠나? 아니면 대수롭지 않은 듯 방심하고 나아가겠나? 하루 동안에도 숱한 염려가 끊이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내 안의 말씀이 나를 붙드시는 것이었으니, 아침 일찍 설교원고를 다시 읽으며 그것으로 나에게 들려주시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먼저는 ‘아무 것도’다. 이건 그렇고 저건 그런 게 아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시는 데는 다 그 원리가 있었다. 그저 막연하고 신비적인 확신이 아니라 어떤 구도를 지니는 순환구조를 연상시켰다. 즉 사는 동안 염려 없이 살 수 있겠나?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염려가 있으니 그럼 기도를 할 것인지, 염려로 인해 다른 길을 모색할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럴 때 성경은 ‘다만’이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뒤 내용과 앞의 내용에서 예외가 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말란다고 염려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런저런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일이겠으나 ‘다만’ 그 모든 일에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아뢰는 일이다. 아뢰는 것은 저에 대한 믿음이다. 그럴만하다 여겨지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하는 대상이 되시기도 하니까 그러는 것이다. 오늘 이사야서의 기록은 그것을 상기시킨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우리를 구원할 자이신데 엉뚱한 데서 왜 굽실거리고 있는가, 하는 말씀이다. 그렇게 다만 기도하면 성경이 보장하는 약속이 있었으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곧 ‘그리하면’ 그렇게 다른 데 정신 팔고 사람을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아뢰면,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놀라운 말씀 앞에 나는 지금도 정리하면서 경이롭다.
사는 날 동안 염려 없이는 살 수 없다. 자 염려가 왔을 때 염려만 할 것인가? 염려로 기도를 할 것인가?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내게 임하는데 그와 같은 평강은 감사를 기반으로 한다. 죽겠다, 죽겠다 하지만 오늘까지 인도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잘 안다. 그러면서 소소하지만 감사하고, 송구하지만 감사하고, 고개를 들 수 없이 죄송할 뿐이지만 감사할 게 너무 많다. 이렇듯 기도는 감사를 내 마음에 떠오르게 하고 감사는 하나님의 평강을 내 안에 퍼뜨린다. 이건 그냥 그럴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확실함이다. 나의 노력과 수고에 의한 것이라면 의심이 들고 주저할 수밖에 없겠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평강이다. 이를 위해 저는 오셨고 사람으로 살다 죽으셨으며 부활 승천하셔서 오늘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이시다. 날마다 내 안에 좌정하시는 이시다. 이를 오늘 시편은 찬양한다.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21:5-6).”
오후께는 머리가 너무 아프고 온 몸이 욱신거렸다. 진통제를 먹었다가 속이 울렁거려 힘들었고, 안정제 때문인지 아니면 몸 상태 때문인지 계속 나른하게 잠에 취해 있었다. 몸도 마음도 피곤한 날이었다. 그렇듯 나 하나 건사하는 일도 힘에 부친다. 아이가 그러해서 못 오겠다고 하는 것을 오라 해야 하는 것인지, 그래라 해야 하는 것인지, 누가 어떤 선택을 하는 데 모르는 척 해야 하는 것인지, 그러면 안 된다고 일러줘야 하는 것인지. 어떠하든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13).” 이 시대를 살면서 더더욱 신뢰하고 믿을 것은 주의 능력뿐이다. 주의 권능뿐이다. 주가 이루시고 행하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어서, 나 하나 주 앞에 바로 서는 일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저마다 내세우는 자부심과 당당함에 주눅들 거 없다. 주가 이루시고 이루셔야 한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그러므로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4).” 오직 말씀, 오직 주의 권능으로밖에는 답이 없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6).” 그리하여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16).”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드릴 말이 없다.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시 21:5).” 오직 주가 하신다. 나는 다만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으로’ 주께 화답하는 것이었으니(19:14),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2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