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이사야 52:6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시편 22:9
때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흩으셨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창 11:7-8).” 오늘 날 ‘코로나19’ 전염병이 창궐하여 극대화되던 사람들의 밀착을 흩으시고, 세계화를 봉쇄하셨다. 나는 문득 빈 경기장에서 야구경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각국으로의 자유로운 여행이 중지되면서 내 집 드나들 듯이 세계 곳곳을 활보하며 응집되던 나라들을 붙들어 세우셨다. 오늘 우리 시대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그러한가 했더니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1-4).” 극대화되었던 세계화는 붕괴되면서 빠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다음으로는 게임으로의 몰락이 아니겠나? 사이버 가상세계가 현실을 능가하고 점점 모든 게 가상과 실상의 혼재로 나아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실제보다 유튜브나 가상의 세계에서 교류하는 것이 활발해졌다. 저마다 독자적인 방송을 가지고 개개인의 교류는 기형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야구나 축구 경기가 그처럼 실시간 중개되고,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이를 시청하면서 나름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교류하며 의사표시를 하는 것에 나는 또 다른 두려움을 느꼈다. 죄는 마치 곰팡이처럼 삽시간에 번지고 이것을 치우면 저것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새롭고 기형적인 형태의 사유와 왕래가 더욱 빠르게 우리 영혼을 잠식할 것 같다. 아,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그러할 때 오늘 아침의 말씀은 큰 위로가 된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사 52:6).”
이러할 때, ‘그 날에는’ 우리가 이 말을 하는 자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어제 오후 문득 스포츠 중계를 보다 그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죄를 흩으시는 하나님과 이내 또 군집하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1-2).” 이와 같은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였다. 그러할 때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의 의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오늘을 살면서 내가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의미는 무얼까? 사람들을 모으고 돌아오게 하고 회개하여 구원을 이루는 것일까? 이제는 세계 방방곡곡 하나님을 모르고 듣지 못한 나라가 몇이나 될까? 그게 아니라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마음이 있어도 외면할 따름이고, 그와 같이 부정하고 부인하는 마음이 팽배하여 극대화되는 종교화를 형성하거나 있어도 없는 것과 다를 게 없는 무의미한 것이 되거나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형성되는 군중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고백은 놀랍기까지 하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시 22:9).” 내가 어찌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아버지로 믿음으로 섬기며 살 수 있는 것인지. 이러한 때에 홀로 방주를 지으며 고작 여덟 명의 가족만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기며 당대의 의인으로 살 수 있었는지. 노아 홍수의 때를 묵상하게 된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나는 우리 가족들끼리만 주일 예배를 지키게 되면서 문득 그러할 때마다 되새기게 되는 이와 같은 말씀을 서두에 먼저 꺼내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즉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38-39).”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작 그 일이 닥치기 전까지도 사람들은 안이하고 무심할 따름이다. 그러니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40-41).”
이와 같은 말씀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고, 주의 은총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42).” 깨어라. 굳세어라. 당당해라. 성경은 이 시대에 더욱 나를 붙드신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4).” 준비해야 한다. 경각심은 현실에 잘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일이다. 노아가 어찌 120년을 그처럼 묵묵히 한 길을 갈 수 있었을까? 모세는 또 어떻고? 뭐라도 해야 했다면 모세보다 다양한 선택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냥 그처럼 미디안 광야에서 주의 때를 기다리는 일이 너무 무기력한 것 같지 않았을까? 다윗은 말할 것도 없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은 또 어떻고? 저마다의 길을 가만히 묵상하다보면 오늘 나의 처지나 상황에 어떤 음성이 들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렘 42:10).” 이것으로 안주하는 게 아니다. 주신 삶에서 그 녹록하지 않은 현실에서 주를 더욱 바람이다.
그리하여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시 22:10).” 이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주를 의지한다.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11).” 모두가 아니라 해도, 그래서 다른 데 정신이 팔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8-20).” 오늘 이사야의 말씀은 다급하게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는 것 같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시 52:1).”
그리하여 우리는 주를 부른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1-2).” 주를 부르고 주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복이다. 그러므로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10).” 이와 같은 진리 앞에서 ‘아멘’한다. 이로써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