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1, 6
나로 인하여 주께서 만족하신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사 53:11).” 이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 이루어내는 대가가 아니다. 거저 주시는 바, 그의 만족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반드시 나를 따”른다(시 23:6). 곧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그러므로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1).” 내가 오늘을 존귀하게 사는 까닭은,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이와 같은 헤아림은 결코 거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12).” 오늘도 날 위하여 기도하시는 주님.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천주교 사상 평가>를 ‘e-북’으로 읽었다. 한 번에 쭈욱, 읽지 못하고 여러 날 동안 읽다 접고 읽다 접고 하기를 반복하였다. 얼마나 지금 이 은혜가 귀하고 소중한지 감격스러워서말이다. 이와 같은 복음의 진리를 간직하고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일인지. 오늘날 이 모든 것이 옛적에도 그러하였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 3:15).”
죄는 반복이고 우상숭배는 학습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숭상과 숭배가 버젓이 난무하는지. 내 안에 이는 온갖 잡념의 것들도 어느 것 하나 우상 아닌 것이 없다.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을 만나 반가워합니다.’ 하는 따위의 인사말을 건네며 모든 정령들을 하나로 묶어 존중이라는 말과 화합이라는 언사로 얼버무려버리려는 행태가 비일비재한지. ‘뭘 꼭 굳이 그렇게 편 가르기 하듯 그럴 거 있나…’ 싶어서 묵인하고 허용하는 수많은 무의식 속의 일상들이 온통 다 이교도적인 행위였고 저들의 주술에 휘말리고는 하는 꼴이었으니. 뉴에이지, 마술, 신비, 요가 등 온갖 정령들을 위하고 바라며 사는 데 있어 ‘우리는 하나’를 외치고 바라는 운동이야말로 적그리스도인 거였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4).”
실은 내가 그러했고, 여전히 내 주위의 친구들이나 누가 그러하고 산다. 그러면서도 교회에를 가고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여긴다. 요가는 몸의 건강을 위한 것일 뿐이고, 뉴에이지 음악이나 그와 같은 명상은 정신과 영혼을 맑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일 뿐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정말 그냥 괜찮아도 되는 것일까? 적당히 이 정도로 믿고 신앙을 가지고 살면 되는 것일까? 그저 다 그러고 사는 일처럼 재미있는 정도면 되고, 그래서 좋으면 되고, 남들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기준이면 그만인 것일까? 그런데 왜들 치받고 올라오는 분노와 갈등에 대해서는 묵과하는 것일까? 아무 이유도 없이 우울하고 자살충동을 느끼면서도 다들 ‘괜찮아, 이 정도는’ 하면서, 그렇게 안주하고 만족하고 평안하게(?) 살면 되는 일일까?
나는 딸애가 읽다만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내내 우울하였고 답답하였다. 같은 시점으로 쓰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 하는 책의 내용만큼이나 사실이면서도 허구였고, 허구 같으면서도 너무 사실이었다는 데 서럽고 두려움마저 느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다들 ‘괜찮아, 이 정도면 돼!’ 하면서들 산다. 그러니 다들 진리는커녕 자기 안의 불만족에 대해서도 그 깊이나 정도를 부정하거나 축소, 은폐하려드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언제부턴가 하나님도 숭배의 대상, 우상으로 전락시킨 지 오래이다.
나는 오늘날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나름 긍정적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동안 너무 밀착되어 살아왔다. 군중 속에서 자신의 자아는 없고 저들의 심리에 휩쓸려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문화를 즐기면서, 남들처럼 사는 게 행복의 최대치가 된 것이다. ‘이만하면 됐지, 뭐!’ 하는 정도에서 우리의 신앙도 감사도 멈추어진지 오래다. 그런 이 세대에 오늘의 말씀은 아리고 아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고작 이 정도 살라고, 이만하면 된 행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그처럼 엄청난 값을 지불하신 것이 아니다.
어디 유명한 브랜드의 커피점에서 3백 잔을 마시면 사은품으로 주는 가방을 받기 위해 3백 잔을 시켜 그것은 버려두고 가방만을 챙겨갔다는 보도를 보고 놀랐다. 또는 옷이나 가방을 담아주는 저들 브랜드 쇼핑백이 호가를 누린다니… 뭔가 단단히 뒤바뀐 게 분명한데도 저마다의 반응은 ‘그럴 수 있지!’ 하고 마는 정도이다. 1993년 시카고에서 6백여 명의 전 세계 종교지도자들이 모였을 때 스스로 신 중의 신이라 자칭하는 달라이 라마가 “영적 대각성대회”를 선포하였다. 앞서 1986년 요한 바오로2세는 이탈리아 아시스 소재 성베드로 성당에서 십자가를 떼고 불상을 놓은 뒤 불교도들과 함께 불공을 드리며 달라이 라마를 치켜세우고, “우리가 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그것, 본질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시카고 대회에서 달라이 라마는 종교의 진보를 위한 ‘템블턴 상’을 수상했는데 우리나라에서 한경직 목사도 이 상을 받았었다는 데서 놀라웠다. 하여간 사람과 사람 사이는 들러붙으면 사단이 난다. 지나친 밀착은 집착이 되고 믿음으로 둔갑한 신념은 완고함으로 더해진다. 누가 어떤 이의 지적, 그러한 ‘종교통합을 묵인하는 기성교회 중 하나’로 자신이 다니던 교회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떠난 일에 대해, 저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였다. 그저 막연하게 ‘이 정도면 괜찮아!’ 하고 여기는 우리의 신앙의 기준이 오늘날 이와 같이 무서운 전염병이 된 것은 아닐까? 누구 뭐라 할 거 없고, 어느 종교, 종파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할 거 없다. 다만 나는 증인이라. 이를 힘써 사는 이유이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이를 나는 나의 생에서 보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여전히 그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지난날 나의 친구들과 내가 아는 사람들만으로 국한지어 생각해도, 누구는 행복하기를 바랐다. 고3 때 결혼한 담임 선생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으로 졸업 후에도 괴로워하다 저는 결국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그 배면의 불행에 대해서는 그 깊이도 정도도 상상하지 못했다. 결국 두 자녀까지 있는 선생을 이혼시켜 자신과 결혼한 후 딸아이를 낳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행복을 추구했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한 가정과 아이 돌잔치에 초대되어 갔다가 그 집에서 하루를 더 묵고 온 일이 기억난다. 얼마쯤 지나서였을까? 얼마 후 그녀는 자기 집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것과 저것이 혼재되어 더 나은 무엇이 되는 게 아니다. 악은 악이고, 죄는 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다. 성경과 코란과 같은 게 아니고, 저들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는 같지가 않다. 마치 기도는 서로를 하나로 화합하게 한다는 소리로 사탕발림을 하곤 하는데,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 14:15).” 아닌 건 아닌 거고,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거다. 내가 이런 소릴 할 면목은 없지만, 나야말로 ‘모든 게 다 하나’를 외치며 그러하기를 바랐고 그리 여기며 살았다. ‘괜찮아, 이 정도면 돼!’ 하면서 말이다. 나의 선생은 여전히 거기에 있고, 나를 아끼고 좋아해주었던 많은 친구들이 아직도 그러고들 산다. 누구는 곧 은퇴를 하면 지리산 어디 예술인 마을에 들어가 살 것인데, 거기에는 ‘종교도 문화도 예술도 인종도 모두가 하나인 자유로운 세상’이라고 자부하였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거기 있는 또 다른 누구 때문에 며칠씩 다녀오곤 하는데, 그럴 때면 현세의 묵은 때를 말끔히 씻어내고 오는 것처럼 영혼이 맑아진다고 자랑한다. 부러웠고, 한때는 나도 그 곳에 가서 살고 싶었다!
그런데 어제 읽은 말씀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4-16).” 오늘 우리가 온전하게 살지 못함으로 이런 사태를 빚었다. 이 은혜를 너무 싼값에 넘기며 살고 있는 셈이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오늘 이사야는 일갈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4).”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이 행복, ‘이만하면 됐어!’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배면의 불행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안이한 것이다. 우울증이 깊어지고 자살이 난무한데도 다들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며 대수롭지 않은 듯 남 이야기 하듯 하며 산다. 그런 가운데 나는 누구의 자살도 겪었고 누구의 정신착란도 보았으며, 여전한 나의 선생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신념 앞에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이 은혜를 하찮은 행복으로 전락시키며 살아갈 것인가?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12).”
오늘의 나는, ‘이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심으로 더는 그릇된 길로 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1,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