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이사야 60:20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시편 30:4
사람은 가장 귀하고, 아름답고, 선하게 여기는 것으로 자신을 억압한다. 그것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여러 감정이 일어나고 그것으로 주의 일을 하지만 그것으로 올무에 걸리기도 한다. 가령 내 안에 이는 어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도리어 나를 옭아맨다. 아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내 의지나 나의 감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임을 여실히 느꼈다. 모처럼 글방에 오는 것이었으니 아홉 시도 안 되어 일찍 온 아이는 뜬금없이 누가 자신의 아이디를 바꾸어놓았다는 것이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찾는데 한 시간 남짓 버벅거렸고,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라 나는 모르는 척하였다. 몇 번은 아이의 그것을 내가 메모해두었는데 그것도 변덕이 생기면 홀라당 바꾸고는 하여서… 정 안 되겠다싶어 새로 만들고 새로 가입을 하라는 데도 아이는 그걸 또 어려워했다. 순간 짜증이 났고 여러 겹의 감정이 부글거렸다. 결국은 숫자 1을 느낌표로 했던 것인데, 저런 어처구니없는 것을 일일이 받아주고 대응하기가 귀찮았다. 엎친 데 덮친 꼴로 아내는 무릎 연골수술을 다른 데 가서 검사를 다시 해볼까, 염려로 계속 전화를 하였고….
속수무책으로 일어나는 감정까지도 모두 나의 것이다. 이를 다 표출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안으로 삭혀 혼자 곱씹어도 안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이 감정이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이끌어갈 역량이 안 된다. 마치 자신하는 자신의 장점이 언제나 자신을 억압하는 첫 술이다. ‘남이 뭐라든지 나만 잘하면 돼!’ 하는 생각은 틀렸다. ‘다 자기하기에 달렸다.’ 하는 말도 우리를 망친다. 오히려 나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속한, 함께 하는 곁의 사람들로부터이다. 아이를 뭐라 나무라다 내 안에 이는 어떤 짜증, 감정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인 것을 느낄 때, 아이 머리 위에 저만치 걸린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가 나를 이끌어가고 주도적으로 이룰 수 있는 역량이 안 된다. 우린 이를 자아라고 하지만 자아보다 자신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감정도 없다. 스스로 참 모습에 도달할 수 없다. 정체성은 자신이 확립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가 속한 사회, 함께 하는 곁의 저 사람들로부터 정립된다. 우리는 그만큼 약하다. 어느 시대보다 강하고 모든 게 발전한 것 같지만 어느 시대보다 쉬 망가지고 한 번에 끝장나는 세상이다. 인천의 어디 아파트에서 60대 부모가 30대 자식과 함께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아직 그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나는 짐작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안타까움이 나를 힘들게 할 때도 그렇다. 잘해야지 하는 억압된 마음이 나를 발전시키기보다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점에서 나의 나 됨을 돌아보고 주께 아뢰게 하신다.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 60:20).”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면, 이를 바로 인정하지 못하는 자아로는 살아낼 수 없는 세상이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오늘 내게 두시는 이 모든 일과 상황과 여건들이 주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 2:10).” 나는 아이가 돌아가고 성경구절을 옮겨 적으며 마음을 주께로 향하였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아이를 내게 두시고 내가 건사할 수 있게 하시기를. 전에 정신과 의사는 나의 이 상황을 듣고 아이의 상태에 대해 ‘쉽지 않은 일!’이라 단정했었다. 그것으로 내가 영향을 받는 것은 차치하고 어쩌면 서로에게 해가 될 수 있는데, 우리 안의 감정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생각보다 자신할 수 없는 것이라 일러주었다. 아,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못 하겠다고 손을 떼고 물러설 것인가?
가정예배 때 이런 일을 얘기하니 모두들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며 뭐라 우려 섞인 말들을 건넸다. ‘감당할 수 있는 자아’가 우리에게 있기는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선하심, 그의 주도하심만을 신뢰하는 수밖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려고, 오늘 나를 억압하는 내가 제일 자신있어하는 것들은 나를 억압한다. 애굽으로 팔아 종노릇하게도 한다. 그게 다 원수가 아닌 가장 가깝고, 가장 마음이 가고, 가장 귀하게 여기는 나의 자랑이었다. ‘자긍심이란 하나님이 나를 지으실 때 느꼈을 법한 감정’이다. 누가 한 말에 밑줄을 긋고 크게 공감하였다. 내가 일군 어떤 성과가 아니다. 그러다 안 된다면 그저 ‘아픈 아이’로 치부하고, 포기하고, 그러려니 해버리려 드는 마음도 문제였다. 아이와 성경을 읽고, 위하여 기도를 하고, 오랜만에 둘이서 식사를 하고 멀리 돌아서 산책을 하다 배웅하였다. 안 됐고 서글픈 아이였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다. 이와 같은 감정이입이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짜증과 동정이, 안쓰러움과 답답함이, 화가 같이 일어난다. 그럴 때면 저의 엄마를 생각한다. 그 형아이의 냉랭한 태도를 이해한다. 인천 어디 60대 부부의 극단적인 선택이 안 됐고 눈물겹다. 사는 게 속상하다.
그러므로 주를 더욱 바라는 일. 분명히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시고 일부러, 의도적인 주의 계획하심이 있음을 확신하고 인정하면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어떤 어려운 역경도 주의 사랑이라. 그러므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4-5).” 이를 알 때 나의 정체성을 운운하고 나의 자아를 따져 물으며 스스로의 자긍심을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하현’이란 이름을 교회 이름으로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었으면! 나의 남은 생이 모두 그러하기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 4:9).” 그리하여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를 사랑하시는 주의 말씀을 나는 사랑한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시 30:4).” 오늘 시인의 간곡어법에도 담겼다. 이사야서는 약속한다.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1-22).” 주가 이루시리라.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시 30:1).” 왜냐하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2).” 이를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야 산다. 우리 주권자, 나의 하나님께는 어려운 일이 없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9).” 그 하나님, 주의 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가 나를 도우신다. 함께 하실 것이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러므로 있는 바 지금의 나로 족한 것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이래저래 두려움도 많고 염려와 근심은 끝이 없고 쉼 없이 갈등과 절망이 내 목을 조이는 것 같다 해도,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길을 주실 것을 믿는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15:15).” 현실은 아무리 어떻다 해도, 그것으로 나의 겉사람은 죽고 속사람은 산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2).” 곧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러니 주만 바라자.
오늘 시편은 이리 손을 내민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시 30:4).” 곧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11-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