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전봉석 2020. 6. 25. 07:36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

이사야 62:12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1

 

 

사는 데 따른 오늘의 일상이 누구에게 하나님의 산증거가 되어야 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8:14).” 우리는 낙관론자가 아니라 더 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다 잘 될 거야!’ 하는 식의 희망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가 되는 삶이다.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주의 재림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죽음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17:34-35).” 아무도 모른다. 이를 준비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은혜였다. 그런데 더디다 하여 노아의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의 때처럼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2:4).” 가끔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다 두려움을 느낀다. 나의 행실을 돌아보게 하신다. 다들 돈돈거리며 사는, 먹고 사는 데 따른 노예가 되어서 더 큰 문제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그러할 때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 이름으로 우리는 기도한다. 주를 바란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2:10).” 우리 구원을 이루신 이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2).” 그의 안에 있던 기쁨을 우리에게도 더하시리니,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이미 이기신 것을 두고 여전히 두려워할 게 아니라, 그 도래할 영생의 나라에 대하여 더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과 살면서 정신 똑바로 차리자. 누구 뭐랄 거 없다. 세상 어떠니 말할 거 없다. 나 하나 바로 서는 게 참 어려운 일이라. 마음은 저 혼자 들썽거려서 이를 가누고 붙들기가 쉽지가 않다.

 

가만히 내게 두시는 육신과 마음의 질곡을 돌아보았다. 사는 데 따른 여러 어려움들은 추상적이나 몸의 질고는 내 몫이다. 장마철이 시작되면서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괴롭다. 앉았다가 금세 일어서서 서성거리고, 서성거리다 또 누웠다 앉았다하루가 다 하고 저녁에 들어오면 온 몸은 녹초가 되었으니. 그저 내게 맡기신 몸뚱이 하나 건사하는 일에서도 나는 지친다. 뭐라 한들, 그런 나를 오히려 떠안고 짊어져야 하는 책임으로 느끼는 아내에게 서운하고 무심히 그러려니 하는 아들녀석의 태도에서 서럽다. 그러니 그런저런 소릴 누구에게 하소연할까.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다른 수 없다. 때론 앉아 있는 일도 서 있는 일도, 그저 하루를 견뎌내는 일이 눈물겨울 따름이다. 그러할 때 오늘의 말씀은 감사하면서도 울컥, 한다.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62:12).”

 

과연 그러할까? 누가 올해 처음으로 책 한 권을 읽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보고 뭐라 말을 해줘야 하는데, 할 말을 찾다가 화면을 덮었다. 아이가 엉뚱한 소리지만 일기를 쓰고 하루를 바동거리듯 보내는 사연이 마음 아픈데 그러니 그걸 나에게 두시는 까닭이 무엇일까? 내 코가 석 자고,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조차 힘에 겨운 날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32:1).” 하시는 말씀 앞에서 나는 송구할 따름이다. 당장 해야 하는 일,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고전 6:2).” 주 앞에 공손히 앉아 나는 나의 나 된 것으로 주를 바란다.

 

내게 두시는 주의 일을 돌아보며 어느 것 하나 감당할 수 없음으로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4:3-4).” 나는 이러는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누구의 판단에도 전에처럼 신경 쓰지 않는다. 주가 다루시는 일이라. 내 의는 내가 이룬 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8-9).”

 

오직 주의 것이다. 하물며 내게 두시는 육신의 고통이나 마음의 무거운 짐들까지도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란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러한 삶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늘 제자리걸음인 것은 둘째 치고 퇴보를 일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를 너무 무시하나?’ 싶어서 서러움과 서운함이 동시에 들 때도 있으나, 그것까지도 내가 가진 의가 아니다. 이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내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러니까 내게 필요한 것은 믿음뿐이라. 주만 믿는다. 늘 같은 일의 반복이고 해도 해도 표도 안 나는 일에 대하여,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2:1-4).” 말씀으로 다잡을 수밖에.

 

그저 믿음뿐이고 말씀뿐이라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다른 마음 필요없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5-8).” 이처럼 가만히 말씀으로 붙들리는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그래서 기도다. 기도로 찬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2).”

 

각자에게 두신 삶이 다르다. 감사와 기쁨으로 살 것인지, 강박적인 열심과 노력으로 살 것인지, 그리하여 주를 찬양할 것인지, 자신의 수고에 따른 결과를 기대할 것인지참 공교롭게도 나의 몸은 이를 바르게 알게 한다. 그러는 거 같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사람에게 의지할 거 없다. 누구를 바라며 그의 이해와 도움을 구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이 자체로 나를 기뻐하신다는 것,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3:17).” 이는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소리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3:5).” 마치 아이를 품은 엄마처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49:15).”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음미하며 견디었다. 책상 아래로는 난로를 켜고, 위로는 에어컨을 돌리면서, 이도저도 어려워 쩔쩔매면서도,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11:8).” 누가 그 속을 알까? 주님뿐이라. 아내는 무릎 수술을 한 번에 두 개 다 하려다가 한쪽씩 석 달 정도 텀을 두고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시무룩하였다. 그러면서 점심을 먹다말고는 나 때문에도 건강해야 한다는 둥 하는 소릴 하는데 듣기 싫었다. 전에 언제 아이가 쓴 글에서 자신을 짐짝 취급한다는 표현이 얼핏 떠올랐다. 책임져야 하고 떠맡아야 하는 것으로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고마움과 서러움이 교차하였다. 아들이 앞에 있어 더욱 무안하였으나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래, 사람마다 다 그 속이 있고 그 속의 일을 누가 알랴.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14:13).” 이를 알아주실 이는 주님뿐이라. 아내는 아내대로 나를 생각해서 하는 소리였겠으나 짐짝 취급을 운운하였던 아이의 심정이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하였다. 무슨 정신이 있겠나싶지만 다 느낌이 있고 생각이 있는 것이어서. 그런 나의 심정에 오늘 말씀은 사명 같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62:3).” 하찮고 보잘것없어 짐짝 취급을 당한다 해도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4).” 주의 은총으로 산다. 이는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5).” ,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리라!

 

그러므로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32:11).” 주의 은총이라. 감사라. 축복이라.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7).” 주의 날들이 나의 남은 날들로 채워지기를.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8).” 그리하여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9).” 아멘.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