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1:9, 19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편 37:5-7
사는 데 따른 두려움이 끝도 없다.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염려와 근심은 우리를 독려한다. 나는 오후께부터 로버트 갓프리의 <칼빈: 순례자와 목회자>를 읽었다. 전에 읽고 밑줄도 그어진 부분이 여려 군데였으나 기억이 흐릿하였다. 요즘은 아들이 앞에서 공부를 하고 나는 평소 이상으로 열심을 다하게 된다. 다 저녁이 되어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종일 찌뿌듯한 날씨로 온몸은 저렸다. 철저하게 말씀을 바탕으로,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에 양심을 걸고 살았던 칼빈의 족적이 새삼 새 힘을 더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바울 사도의 결연한 증거가 나에게도 힘이 되었다. 어디가 어떻든지, 무슨 일이 어떠하든지 ‘오직 성경’으로!
오늘 아침 새로 묵상을 시작하는 예레미야서에서도 나는 그와 같은 말씀을 붙든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 1:9, 19).”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시는 말씀에서 힘을 얻는다. 내가 무엇으로 맞설 것인가? 성경에 대해 설왕설래 말들이 여럿이나 ‘시계는 시간만 잘 맞으면 된다.’ 사는 데 따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시계를 던져 물건을 잘 맞추지 못한다고 좋은 시계가 아니라고 얼빠진 소릴 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듯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의 기준은 참으로 모호하고 억지스럽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말씀을 외면하면서 도덕과 선을 추구하는 삶이란 게 얼마나 모순인가? 누구는 도덕의 의무가 사람에게는 없다고 하고 그러니 선악의 실제도 없는 것이라 하였다. 신은 없다, 죽었다고 한 니체도 공리주의를 비웃었다. 공리주의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모두 다 이를 최선이라 하는 논리인데, 신이 없음으로 도덕적 사실도 없다는 것이다. 하긴 그런 점에서 되레 니체는 솔직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는 도덕의 의무는 그냥 주어진 사실이고 그게 다일뿐이라고 했다.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나무는 나무이지 나무를 보고 신을 찾는 일은 어리석다는 소리였다. 그러면서도 저마다 자신의 신념과 주장은 남다르다고 여기면서 산다.
산다는 일에 어떤 기준, ‘오직 성경’이 없다면 이 얼마나 모순되고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나는 비루한 몸을 이끌고 장마철 한복판을 지나면서, 책상 밑으로는 난로를 켜고 머리 위로는 선풍기를 돌리면서, 이와 같은 공부로 공부하는 아이 앞에서 덩달아 공부에 진지하였다. ‘오직 성경’ 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성경을 뒤적거리며 말씀이 제시하는 아홉 가지의 ‘하라’는 간곡한 어법을 찾았다.
하나, 말씀을 읽어라.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4).”
둘, 말씀을 분별하고 자신을 드리기를 힘써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셋, 말씀으로 마음을 비추어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넷, 말씀을 찾아라.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잠 2:4-8).”
다섯, 말씀을 생각하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여섯,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일곱,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8).”
여덟, 말씀을 전파하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아홉, 주께 맡기고 기다리라.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5-7).”
‘오직 성경’의 권위로 사는 데 따른 결연한 의지로 이와 같은 말씀을 되새기기에 충분하였다. 성경은 곧 능력이다. 그 안에 있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 나온다. 나로 은혜대로 살게 하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지금의 모든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신다. 그저 사는 일에 급급하고 사람들의 얄팍한 지론에 휘둘리지 않게 하시려고,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와 같은 말씀은 오늘을 사는 분명한 기준, 이유, 목적이 되어준다. 신은 없다, 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면 더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어진다. 선과 도덕의 기준도 모호해질 따름이다. 그저 사회 구성원들 다수의 행복이 선이 되는 세상에서, 끊어질 수 없는 주의 사랑을 붙들게 하시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 무엇도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이미 덧입은 의를 벗길 수 없다. 이는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선, 나의 도덕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어떠하다가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오직 성경’으로 나를 붙들었을 때 전혀 새로운 나는 즐거워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17).” 늘 여전하기 이를 데 없고 속은 저 혼자 느글거려 괴로울 때도 많이 있지만, 성도는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3-14).” 당시 데살로니가에서 성도들의 몰이해가 죽음에 대해 회의를 가져오고 있었다. 곧 예수의 재림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렸는데 그 시간은 묘연하고 오히려 안타까운 성도들이 죽어가고 있었으니, 그도 그럴만하였다.
이에 바울은 보다 못해 성도의 죽음에 대하여 ‘자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잔다는 것은 곧 깬다는 소리다. 죽으면 영원한 잠에 든다는 지론이나, 그것으로 무(無), 없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의 윤회사상처럼 또 다른 누군가로 태어난다는 소리도 다 허황될 따름이다. 바울은 설명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죽으면 저들은 즉시 예수가 계신 곳에 함께 있다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많은 성도들도 같이 오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를 또 죽으면 어디, 그럼 천국 전에 가는 중간기, 연옥 같은 이론을 들먹이는 부류도 있는데 그것도 성경에 비춰 맞지 않다. 먼저 성도의 죽음에 대하여 예수님도 ‘잔다’는 표현을 쓰셨다. 마가복음 5장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잔다 하시고 비웃는 저들 앞에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41).” 이와 같이 우리는 즉시 다시 깨어날 존재이다. 십자가 위에서 한 강도를 보시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죽음과 함께 우리는 즉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머문다.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저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그곳에는 모세도 엘리야도 다윗도 이사야도 있는 곳이다. 그곳에 머물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같이 온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예수님도 가르치셨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 즉 이를 미련한 말로 듣고 믿지 않으면 저는 다만 죄 가운데 있을 뿐이어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4).”
그러나 우리는 몸을 떠나면 우리 영혼은 주와 계신 거기에 머문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그래서 어떠하든지 오늘의 삶은 값지다. 왜냐하면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9).” 곧 생사의 갈림길에서 어디에 있든지 주와 함께 있는 것,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곧 우리는 이 둘 사이에 끼었으니,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2-24).”
이와 같은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죽음에 대해 까불면서 ‘웰-다잉’이니 '무슨 죽음'이니 하는 따위의 연구가 얼마나 가소로운가를 알 수 있다. 내가 아는 누가 의사 일을 그만두고 노년에 죽을 죽음을 연구하며, <잘 죽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하였을 때 나는 저의 말이 허허롭게 들려 뭐라 대꾸할 게 없었다. 우리의 죽음은 육신으로는 자는 것이고, 영으로는 주가 계신 곳에 머무는 일이다. 그러하다 예수 재림하실 때 함께 성도들을 맞이하러 왔다가 (아직 살아서 사는 동안에 오시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의 하나님의 나라는 그 어떤 무엇보다 완전하고 영화롭고 경이로운 곳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고, 완전한 육신을 덧입고 영원히 거기에서 하나님과 같이 산다.
일찍 일어나 말씀 앞에 앉을 때의 이와 같은 풍요로움으로 나는 종종 그 맛을 느낀다. 그러니 오늘도 말씀이 나를 이끄실 것이다. 그러므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5-7).” 덧붙여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말씀을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되새긴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