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전봉석 2020. 7. 3. 05:5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예레미야 4:22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시편 40:11

 

 

소망이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나의 심령이 피곤하도다.’ 사는 데 따른 사람들의 여러 갈래 이야기로 숨 가쁘다. 누가 지지난 주에 예순한 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일찍 이혼을 하고 자녀들과도 등지고 살던 터라, 저의 장례는 조촐하여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몇 안 되는 문상객들 중에 한 여인이 그리도 슬프게 우는데, 알고 보니 연인이었다 하고, 어느 중학교 영어교사였다고도 하고, 모 교회 집사였다고도 하는데 저가 유부녀라는 소리가 더 빨리 돌았고 다들 뒤에서 눈을 흘기며 혀를 찼다고 하였다. 나는 그저 전화상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는데 저 또한 죽은 형님과는 왕래가 거의 없어서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고 하니종종 다른 세상 이야기를 듣는 듯도 한 이런저런 말에 나는 자주 할 말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서로들 결혼은 미루고 동거를 하는 것으로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사는 모양이 크게 다르지가 않다. 일련의 상황을 보며 뭐 좀 느끼는 게 없는가? 하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그저 남 이야기하듯 자신들의 이야기를 대수로워하지 않으니, “나는 있느니라.”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24:39).”

 

서로의 시각은 서로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가령 인천국제공항 정규직전환 문제를 놓고 연일 공방이 이어지고, 그것으로 대통령의 선호도가 추락했다는 보도를 보면서도죽어라 하고공부를 해서 정규직으로 채용된 이의 입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입사해서 2년여의 시간을 근속하면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한다고 하니, 이쪽은 그게 억울하고 저쪽은 저게 억울한 것이다. 그렇다고 죽어라 하고 현장에서 근무하며 언제 부당해고를 당할지 모르는 가운데 죽어라 하고같은 근무여건에서 일하면서 허드렛일까지 도맡아야 하고, 그래봐야 임금 격차가 2배 이상으로 벌어지니, 어떤 이는 그와 같은 차등이 부당하다 하고, 누구는 당연하다 하면서 세상은 믿는 우리들에게까지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누구는 사랑하는 연인이었으니 저들을 불륜이라 할 수 없다 하고, 누구는 그럼에도 유부녀이면서 또한 교사가 할 짓이냐고 혀를 끌끌 차는데 죽은 이의 장례식장에서 몇 명 안 되는 문상객들이 서로 나뉘어 서로 다른 쪽의 이야기로 나눌 내용은 아닌 듯하였다. 나는 이와 같은 저런 이야기에서 물러나 앉은 것에 감사하였다. , 소망이 없이 이러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일은 그 자체로 비참할 따름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5-6).” 우리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세상에서 무관해야 한다. 끝날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교회가 또는 믿는 이로서 어느 쪽에 선다면 그것이 되레 무거운 신념이 되고 아집이 된다. 과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음 바 되었나?’ 우리는 당당히 어느 한쪽에 서서 다른 쪽을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위인인가? 내가 경건하지 못할 때에 경건하지 않은 나를 위해 죽으신 이가 있었다. 노예무역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은 돌이켜 목사가 되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하는 찬송을 지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26년간이나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정치일선에서 싸웠다. 결국 노예 제도를 없앤 것도 기독교인이지만 노예 제도를 받아들이고 찬성하였던 쪽도 기독교인들이다. 나는 늘 누구와의 대화에서 너는 어느 쪽이냐?’ 하는 투의 사안에 대해 입을 다문다. 존 뉴턴의 말처럼 먼저 수렁에서 건지심을 받았다고 해서 아직 수렁에 있는 자들에게 돌을 던져서야 쓰겠나? 은혜 아니면 오늘의 나도 없다. 주의 긍휼하심으로 나는 이제 산다. 나는 이제 어느 쪽이 아니다. 우리 기독교는 도덕적인 양심을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라.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2:21).” 주의 백성으로 그의 자녀가 된 자로서 이쪽과 저쪽을 나누어 견주는 도덕의 기준을 앞에 두고, 다만 나의 죄 됨을 경계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19-20).” 부디 <모든 입을 막고> 육의 일과 영의 일에 낀 상태로 사는 것이었으니, 우리는 어느 쪽이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과 안타까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4:22).” 행여 우리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을. 오늘 말씀처럼 나는 그러하지 아니한가? 여전히 저기에 서 있는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동조도 동의도 반론도 없이 너 하나 바로 서기’를 말하려는데, 저는 벌써 그런 나의 반응에 시큰둥하였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40:11).” 나는 한 시도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선을 바랄 수도 없고 의를 구할 수도 없다. 가십거리 정도로 설왕설래, 남의 말을 별식같이 여기는 세상에서 우리들이 어느 쪽이냐는 강요에 휩쓸려 다니면 쓰겠나? 주가 우리 안에 두시는 마음은 투쟁이 아니라 자족하는 자의 비결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4:11-12).” 노예들을 실어 나르던 무역선의 선장이었던 존 뉴턴 목사가 불렀을, 저의 뼈저린 고백을 묵상해본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새찬송가 305)

 

나는 할 수 없으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다, 하는 바울사도의 고백도 그러한 게 아닐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어느 쪽에 서서 서로를 향해 너는 어느 쪽인가?’ 하고 묻는 일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나는 그래서 정치 사회 문화 현안에 대해 누구와도 언쟁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양쪽 다 죽기 살기로덤벼들 수밖에 없는 오늘의 죄악 된 현실에서 그래도 좀 나은 쪽이라고 색깔론을 펼친들! 주의 은혜 아니면 이때껏 살 수도 없었을 위인인데, 주 앞에서 정직한 삶은 통회하는 마음뿐이라.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119:7).” 그런 잘 살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5:2).” 섣불리 말에 담에 누구의 사연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다. 의도적으로라도 우리 믿는 자들은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 현 정권에 대해서도 지난 정권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즐겨하지 말아야 한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7:9).”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는 누구와 무슨 현안에 대해 또는 어떤 이의 이런저런 사연에 비판하려 하지 않는다. 말을 얹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그렇구나, 또는 아니구나 하는 정도이면 된다. 그리고 주께 아뢰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40:11).” 주의 긍휼이 아니면 하루도 살 수가 없는 사람이다. 세상으로는 비루하고 허접할 따름이겠으나, 우리를 낙심케 하는 것이 얼마나 수시로 닥쳐오는지 모른다.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12).” 그러니 같이 동조하는 사람들과 세를 합쳐 진영논리에 갇히든가 흑백논리로 무장을 한다 한들? 그러는 나는 좀 나은 편인가?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3).” 지혜자는 말하였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19:1).” 묵묵히 감사함으로, 그리하면 주께서 이끄신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30:15-16).”

 

그러니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4:29).” 가만히 오직 가만히 주 앞에 엎드려 주의 은총으로 감격할 뿐,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12-13).” 이에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