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전봉석 2020. 7. 7. 06:08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예레미야 8:9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시편 44:6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의 도덕적 의무도 없어진다. 굳이 선하게 살고 의로움을 추구할 이유도 기준도 사라진다. <이방인>의 작가 알베르 까뮈도 신이 없다면 우주에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이 없을 가능성보다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넘겨짚었다. 종종 가장 놀라운 기적은 내 안에서 이는 안타까움이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믿음이다. 안 믿겨야 정상일 텐데 이상하게 믿어지고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이다. 말씀 하나하나가 별다른 의문 없이 아멘으로 받아진다. 누구와 통화하다 저들의 번뇌에 나는 놀라워할 따름이었다. 어찌 안 믿어질까? 뭘 그토록 의심하고 되묻고 그럼에도 수긍하지 못하는 것일까? 다들 참 많이 배우고 가진 게 많고 사회적으로도 놓을 수 없는 지위와 직업과 학식을 가졌으니,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10:25).”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겠다. 저가 전에 보내온 어느 갑부의 죽기 전에 묻는 질문에 대해, 여전히 이를 자신들이 등에 지고 있었으니! 오늘 말씀이 마침 시의적절하게 다가온다.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8:9).” 이와는 다르게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44:6).” 하는 고백이 내 것이라. 나는 보잘것없고 내세울 게 없어서 감사하였다. 그 교회는 다들 최소한 가진 것도 배운 것도 그 정도여서 매주 이어지는 말씀에 설왕설래 말들을 보태는가보았다. 듣다보면 가진 것도 죄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얻고자 스스로 애써 노력한 것에 대한 지분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니 누구는 교회를 비판하며 참 복음(?)’을 찾아 떠났다가 돌아오고, 돌아온 저들 부부를 중심으로 주일 예배 전에 성경모임들을 갖는데 순장을 맡은 이가 또 한 축 교회에 힘을 보태는 자라, 교통정리를 하듯 심지어는 주일 설교에 대해 저의 지론은 풍부한 체험과 성경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모두를 압도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마침 주일에 나눈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시편 22편을 토대로 설명해줄 수 있었다. 곧 저들 사이에 누가 잘 살고, 잘 늙고, 잘 죽는 훈련을 강조하여 그것에 그렇게 관심을 많이 가진 모양이었다.

 

어려워! 하는 저의 말에 나는 기꺼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켰다. 그게 끝이 아니라. 쉼이 그저 안이함이 아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 먼저는 쉬워야 정상이다. 가볍지 않다면 쉬지 못한다는 것이고 이는 여전히 자신의 멍에를 메고 있어 그러한 것이지, 만일 주의 멍에를 메고 가볍지 않다면 순전히 이것은 주님 탓이다. 나는 주의 멍에를 멨고 그리하여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10:38).” 하시는 말씀에 그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데, ‘너무 어려워! 점점 더 어려워!’ 하는 저의 말이 사실이면 둘 중에 하나이다. 자기 멍에를 여전히 자기가 지고 있거나(즉 예수의 멍에를 메지 않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순 거짓을 말씀하신 것이거나! 그렇게 우리의 자기 십자가는 팔자소관이 아니다.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데 따른 어려움과 책임져야 할 변변치 못한 자식과 가정과 늙으신 부모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빠듯한, 먹고 사는 이놈의 팔자를 운명이려니 하고 '십자가로 지고 사는 일'이 아니다. 전에 나도 그리 여겼었다. 그러니 주어진 대로 감사하며 살던가, 아등바등 기를 쓰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며 살던가! 그런데 바울의 명징한 말씀 앞에서 이제는 확실해졌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

 

이것이 오늘 우리가 지고 가야 하는 자기 십자가이다. 내 멍에가 아닌 예수의 남은 멍에이다. 그럼 분명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9-30).” 하는데 자꾸 어려워지는 까닭은 그 이유가 분명하였다. 전에는 이런 말에 무조건 튀어나오는 반응이 몰라, 어려워!’ 하는 투여서 스스로도 고백하는 것처럼 주일 지키고, 헌금 잘 내고, 이 정도 믿으면 됐지, 하는 마음이 집약적이었다면 지금의 어려워는 주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자기 안의 또 다른 자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어야 맞다. 하여 바울의 절규처럼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7:22-23).” 이로써 자신의 죄 됨으로 어려워하는 일이었으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주님 앞에서의 몸부림이라. 그러해야 옳다. 나이 마흔을 넘겨 죽어라 하고 박사학위까지 땄는데, 아무 것도 되는 일은 없고, 꽉 막힌 도로 같으니 그것으로 인한 절규가 아니어야 한다. 도리어 이와 같은 절규는 감사로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알면 알수록 주밖에 없어 감사한 것이다.

 

말씀으로만 살고 주의 영광만을 구하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9:1).” 곧 보이는 어느 것도 다 주의 영광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2-4).” 하는, 이를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도 알면서 왜 그처럼 순종이 어려운 것일까? 마음의 기쁨을 잃은 지 오래고, 믿는다는 일조차 힘에 겨워 그것으로 어렵다하는 일이면 여전히 내 안에는 ‘~하셨더라면!’ 하는 원망 섞인 가정법적 자기 논리와 의무가 앞서는 까닭이다. 그 좋은 예가 죽은 나사로의 두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이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21).” 하고 또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 한. 좀 안다, 배웠다 하는 이들 속에는 공통적으로 사로잡히는 마음이다. 그런 저들에게 예수님은 진리로 응수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5).”

 

그리하여 여러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의 고백이 귀하다. 말이 필요없는 것이다.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5:33-34).” 그 앞에 엎드리는 것.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5:8).”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나는 예배 전에 물론 아이들 주일학교에 데려오느라 그 시간에 자연스럽게 모이게 된다 해도 차라리 그런성경모임을 자제하면 어떨까? 하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예배 전에 말씀을 앞두고 저들끼리, 성경을 나누고 그에 따른 다양한 의미와 풍성한 학식과 경험을 토대로 설왕설래하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진리는 토론의 주제가 아니다. 성경은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이에 질세라, 서로는 말에 밀리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드러내고 나름의 체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풀이하려 한다. 까뮈의 경우처럼 자기 이해와 자기 지식으로 넘겨짚어 신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은 살아있다고 고백한들? 설교 내용을 갑론을박 하여 해석은 제각각이고, 그러니 알면 알수록-믿으면 믿을수록 어려워하는 말은 가히 과장된 표현이 아닌 거였다

 

이에 적합한 말씀이 떠오른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2:13).” 그냥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 앞에 내려놓으면 될 것인데, 옆에 생수의 근원을 두고 자신들의 우물을 파겠다고 삽질이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도 모자라 그 안에 물을 가두려는데 이게 또 터진 웅덩이라. 그러니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어, 어렵다. 힘들다. 나름 잘 믿는다고 믿는데 죽겠다! 그럴 때면 신기하게 이를 동조하는 같은 무리가 있다. 한 때 나도, 누구는 목사 아들이 있었고, 모태 신앙에 신학을 전공하다 의사가 된 천주교인도 있었고, 성가대 지휘자로 성악을 전공하여 애쓰며 봉사하는 열심주의자도 있었다. 일부러 그리 어울리려던 것은 아닌데 다들 터진 입이라, 스스로 합리화하는데는 누구도 뒤지지 않았다. 그에 따른 사회적 성공으로 보란 듯 잘나가는 축복의 통로(!)거 있었고, 누군 무슨 주식을 하거나 어디 집을 사면 어김없이 턱턱, 배로 뛰고는 하였으니서로의 체험이 곧 서로의 증거가 되어 날마다 축제’처럼 서로의 신앙을 자부하였다. 거침없이 기존 교회를 비판하고 그래서 교회를 안 나가고 궁상을 떠는 신실한 주의 사람들을 비난하였다. 그야말로 손에 쥐는 게 복의 근원인 것 같았다. 자식들은 천재소리를 들었고, 하는 일마다 뻥뻥 달만 터졌으니까!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밭을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8:10).” 이제 누구는 이혼을 하고 가까이 지내던 누구와 동거를 하고, 천재라던 자식은 일류의 길을 걷다 실패 후 가출을 해서 폐인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11).” 나의 선생은 여전히 거기 있고, 나의 친구와 나와 가까이 어울렸던 이들은 이제 여기에 있는 나를 조롱할 따름이다. 다들 자신들이 옳다 하면서 여전히 자부하는데, 입만 열었다 하면 죽겠다고 아우성이다.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18).” 과연 저들은 알까? 나는 누구와의 통화에서 오늘의 쉼과 이 안식을 어찌 말해줄까, 조바심이 다 날 지경이었다. 부디 내게 보이는 것이 저에게도 들린다면, 나에게 들리는 것이 저에게도 보일 수 있다면!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29:4).”

 

가장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그러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8:20).”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44:1).” 이처럼 들리는 것이 보이고, 보이는 것이 들리는 일이 기적이요, 가장 큰 축복이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6).” 하면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8).” 아멘.